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탈원전, 탈 날까 겁나"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7.24 17:23

수정 2017.07.24 17:23

독일은 오랜 '숙성' 거쳐 결정
우리도 압도적 지지 기다리며 좀 더 영근 뒤에 하면 어떨까
[곽인찬 칼럼] "탈원전, 탈 날까 겁나"

"내가 이러려고 공기업 이사 됐나. 한국수력원자력 이사 자리가 꿀보직이 아니라 원수가 됐어. 새 정부가 탈원전을 밀어붙이면서 생긴 일이야. 생각해봐. 한수원은 원전을 돌리는 회사야. 새 원전을 짓는다는데 누가 반대하겠어. 그런데 어쩌다 이사회에서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일시 중단하기로 했냐고? 곤란한 질문 하시네. 정부 눈치 봤다는 비판은 달게 받겠어.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 정부가 탈원전을 너무 서두른다는 거야. 이러다 탈 날까 겁나.

탈원전 찬성론자들은 독일 예를 자주 들어. 맞아, 독일은 탈원전의 선구자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6년 전 원전 17기를 2022년까지 모두 폐쇄하기로 했어. 독일 같은 제조업 강국이 이런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아. 무슨 사정이 있을까.

몇 가지 사건을 알아야 해. 첫째가 빌(Wyhl) 사건이야. 1975년 독일 정부는 남서부 시골마을 빌에 원전을 지으려 했어. 그러자 농부들이 들고 일어났지. 경찰은 농부들을 질질 끌고 갔어. 그런데 이 모습이 TV로 중계된 거야. 시민들은 분노했어. 자연스레 빌은 독일 반원전 운동의 발상지가 됐지. 1980년 녹색당 등장도 중요한 이정표야.

1986년 우크라이나(당시 소련) 체르노빌에서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터졌어. 낙진이 온 유럽을 뒤덮었지. 독일인들은 경악했어. 시위대와 경찰은 도심에서 연일 충돌했지. 녹색당은 1998년 좌파 사회민주당(SPD)이 주도하는 연정에 합류했어. 환경장관 자리도 꿰찼고. 사민.녹색 연정은 2021년까지 독일 원전을 순차적으로 폐쇄하기로 합의했어.

그런데 이걸 우파인 기독교민주당 출신 메르켈 총리가 뒤집은 거야. 원전을 대체할 러시아산 에너지 공급이 불안하다는 이유를 댔지. 그러자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어. 마침 그때 일본 후쿠시마에서 대형사고(2011년)가 터졌어. 여장부 메르켈도 두 손 들 수밖에. 원전 '컴백' 정책은 없던 일이 됐어.

빌 사건부터 따지면 40년, 체르노빌부터 따져도 30년 동안 독일은 탈원전 로드맵을 밟은 셈이야. 원전.방폐장 주변은 물론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끊이지 않았어. 여론도 똘똘 뭉쳤고. 메르켈의 원전 '컴백'에 반대하는 비율이 80%에 달했으니까.

독일에 비하면 한국은 탈원전 운동 역사가 짧은 편이야. 여론(갤럽 7월 11~13일)을 봐도 원전 찬성(59%)이 반대(32%)보다 높아. 광화문광장에서 원전을 없애라는 유모차 촛불시위가 벌어진 적도 없어. 탈원전 운동이 채 영글지 않았단 뜻이야.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고사가 있어. 옛날 중국 춘추시대에 송나라를 다스리던 양공이 전쟁터에서 '인의' 깃발을 내세웠다 본전도 못 찾았다는 이야기야. 신하들은 적이 강을 건널 때 치자고 했어. 하지만 양공은 인의에 어긋난다며 거절했지. 진을 치느라 어수선할 때도 그냥 내버려뒀어. 결국 송나라는 크게 졌지. 간신히 도망쳐 나온 양공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어. 세계 원전시장은 소리 없는 전쟁터야. 행여 우리만 '인의' 깃발을 휘날리는 건 아닐까. 게다가 주변국들은 하나같이 핵.원전 강국들인데.

원전은 생산원가가 제일 싼 에너지야. 원전을 줄이면 전기료는 뛰게 돼 있어. 지금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도 정권 바뀌면 원위치될 공산이 커. 내 비록 이사회에서 공사 중단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어. 이게 진짜 내 속마음이야."(이 글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썼습니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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