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재건축 족쇄, 얼마나 갈까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12 16:55

수정 2018.03.13 15:37

더 좋은 집 원하는 건 본능.. 한국 30년은 해외선 100년, 정부가 누른다고 눌러질까
[곽인찬 칼럼] 재건축 족쇄, 얼마나 갈까

서울 양천구 목동아파트에 27년째 산다. 같은 단지 안에서 한번 이사했다. 대체로 만족한다. 다만 30년 된 아파트라 주차장이 좁다. 지하주차장도 없어서 비나 눈이 내리면 불편하다. 화장실이 하나라 난처할 때도 있다.
예민한 이에겐 층간소음도 꽤 신경이 쓰일 것 같다. 내부 구조도 좀 촌스럽다. 새 아파트라면 같은 평수라도 서너평은 더 넓게 살 수 있을 거란 말을 종종 듣는다. 그렇지만 안전에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배관이나 난방도 괜찮은 편이다.

요즘 아파트 경비원들이 바쁘다. 며칠 전 재건축 안전진단 서명서를 가져왔다. 기준을 조이는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내용이다. 정부는 재건축을 판정할 때 구조안전성 비중을 20%에서 50%로 높였다. 반면 주거환경 비중은 40%에서 15%로 내렸다. 오래된 아파트라도 튼튼하면 재건축 도장을 찍어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일로 주민들이 들끓고 있다. 며칠 전엔 경비원이 청와대에 보낼 탄원서를 또 가져왔다.

재건축에 대한 내 생각은 중립이다. 물론 새 아파트에 살고 싶은 욕심은 있다. 널찍한 주차장이 제일 부럽다. 사물인터넷이 팡팡 터지고, 지하에 사우나.수영장이 딸린 집을 누가 마다하랴. 게다가 우리집은 5층짜리다. 재건축을 하면 분명 평수가 넓어진다.

하지만 그러려면 집을 부수어야 한다. 불편하지만 못 살 정도는 아니다. 자원 낭비도 부담이다. 잘 자란 나무들을 베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나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안전진단 기준을 깐깐하게 바꾼다고 발표했을 때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뒤 절차가 참 고약하다. 정부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다. 목동아파트 재건축 이야기가 나온 건 줄잡아 5년은 된 듯하다.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 후보들은 재건축 공약을 내걸었다. 주민들도 꽤 오래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전체 14개 단지를 아우르는 초대형 청사진이 막 그려질 참이었다.

이런 기대를 정부가 단칼에 잘라버렸다. 행정예고는 열흘로 줄였고, 예고가 끝나자마자 시행(5일)에 들어갔다. 경과 규정도 두지 않았다. 그 흔한 청문회 한번 안 했으니 말 다했다. 정책 소비자인 납세자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정치인 출신 김 장관이 이럴 줄은 몰랐다. 재건축 추진에 중립인 나마저 불통 행정에 화가 날 정도다.

입시제도를 바꾸면 시행까지 최소 몇 년 기한을 준다. 대학은 일생을 건 선택이기 때문이다. 한국엔 아파트가 전 재산인 사람이 많다. 이들에겐 재건축이 일생일대의 모험이다. 이처럼 중요한 일을 정부는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뚝딱 해치웠다. 아하, 알겠다. 역시 아파트 안전은 핑계다. 정부 속셈은 오로지 투기를 잡는 데 있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집을 소모품이나 유행품처럼 취급하는 한국의 주거문화에 놀란다. 그는 "재개발과 재건축을 통해 새로 등장하는 아파트는 한결같이 고층화와 고급화, 첨단 감시장치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아파트공화국'). 아파트를 변두리 소외와 동일시하는 프랑스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30년은 다른 나라에선 50년, 100년이다. 더 좋은 집에 살려는 욕구를 국가가 언제까지 억지로 누를 수 있을까. 재건축 찬반을 떠나, 주거환경 비중을 15%로 낮춘 건 심했다.
문재인정부가 채운 재건축 족쇄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데 한 표 건다.

곽인찬 논설실장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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