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사회

<월드리포트>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의 그림자

박종원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6.29 10:35

수정 2018.06.29 15:26

콜롬비아 남부 과비아레 주의 인리다 강 주변에 자리잡은 비밀농장에서 2017년 9월 25일 촬영된 사진 속에 한 농부가 가공하기 전 코카잎을 옮기고 있다.AFP연합뉴스
콜롬비아 남부 과비아레 주의 인리다 강 주변에 자리잡은 비밀농장에서 2017년 9월 25일 촬영된 사진 속에 한 농부가 가공하기 전 코카잎을 옮기고 있다.AFP연합뉴스


1993년 12월 2일, 한 중년 남성이 콜롬비아 메데인의 한적한 주택가 사이로 도망치고 있었다. 4년 전 포브스가 뽑은 세계 7위 부자이자 1980년대 세계 코카인 공급의 80%를 담당했던 메데인 카르텔의 두목 파블로 에스코바르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마약왕'이라고 불렸던 그가 이날 허름한 연립주택 지붕에서 콜롬비아 정부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을 때, 미주대륙 곳곳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콜롬비아 마약전쟁은 끝나는 듯싶었다.


미국 백악관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이달 25일(현지시간) 보고서에서 지난해 콜롬비아에서 코카인의 원료가 되는 코카잎 재배지 면적이 전년대비 11% 늘어난 2090㎢로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콜롬비아의 잠재적인 코카인 생산량 역시 921t으로 10년 전에 비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미 마약단속국(DEA)에 따르면 2017년 미국에서 압수된 코카인의 92%는 콜롬비아산이었다. 이는 메데인 카르텔이 1980년대 전성기에 미국에 공급하던 코카인 비율(전체 대비 약 80%)보다 오히려 늘어난 숫자다.

이 같은 결과는 영악한 마약 조직과 반군, 무능한 정부, 가난한 농민들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콜롬비아 마약 시장은 파블로 사후 메데인 카르텔과 경쟁하던 칼리 카르텔에게 넘어갔으나 칼리 카르텔 역시 DEA와 정부군의 추격으로 1995년에 두목이 체포되면서 무너졌다. 이들 카르텔의 잔당들은 파블로가 일궜던 1세대 카르텔처럼 사병을 키우고 방송에 출연하는 대신 당국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소규모 조직들로 갈라졌다. 동시에 우익 민병대인 콜롬비아통합자위대(AUC)나 콜롬비아혁명군(FARC), 민족해방군(ELN)같은 좌익 반군과 결탁해 보호를 받았다. 그 결과 이들 무장조직들은 콜롬비아에서 2세대 카르텔로 자리 잡으며 마약 시장을 인수했다. 특히 콜롬비아 최대 반군인 FARC은 메데인 카르텔 잔당과 함께 마약 제조 및 유통을 주도하고 코카인 재배 농가로부터 '혁명세'를 뜯었다. 마약 시장은 AUC가 2006년에 정부에 항복하고 시날로아 카르텔같은 멕시코 마약조직이 원산지 확보 차원에서 콜롬비아에 진출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이를 막아야할 현지 정부는 부정부패와 경제난으로 무기력하기만 했다. 지난 2006년에는 콜롬비아 국회의원 65명이 선거에서 무장조직의 도움을 받은 혐의로 체포됐다. 2008년에는 콜롬비아 상원의 3분의 1이 무장조직과 연계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콜롬비아 정부는 코카인 재배 농가가 합법적인 농작물을 키우도록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재정이 여의치 않다. 미 경제지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지난 3월 보도에서 농작물 전환 신청자 가운데 보조금을 받는 비율이 4분의 1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이 와중에 농민들은 마약 조직의 협박과 다른 작물에 비해 월등히 비싼 코카잎 가격에 농사를 계속하는 상황이다. 콜롬비아의 코카밭 넓이는 지난 2016년 정부와 FARC가 코카잎 재배 농가의 작물전환 지원이 포함된 평화조약을 맺자 전년보다 39% 넓어졌다. 전환 보조금을 노린 농민들이 앞 다퉈 코카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코카밭 넓이는 FARC의 해산 이후 과거 FARC의 영역에 난립한 군소 무장조직 및 마약 카르텔로 인해 더욱 넓어지는 모양새다. 지난 2015년에 의료용 대마초 재배 및 수출을 합법화한 콜롬비아 정부는 마약성 작물 재배농가에게 차라리 대마초를 키우라고 권하고 있다.

이미 2000년 이후 15년간 마약 근절을 위해 콜롬비아에 100억달러(약 11조원)를 지원한 미국은 이제 인내심이 바닥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해 콜롬비아가 지정된 코카잎 감산에 실패한다면 지원을 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아울러 이달 콜롬비아 대선에서 승리한 이반 두케 당선인은 FARC와 평화조약이 너무 관대하다며 코카 농가에 보조금 지급을 꺼리고 있다. 친미파로 알려진 두케 당선인이 만약 코카밭 제거를 강행한다면 정국이 불안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파블로가 죽은 지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그가 콜롬비아에 드리운 '마약왕국'의 그림자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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