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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프레임 가득 채운 공간의 미학

사진 거장 칸디다 회퍼 '깨달음의 공간' 그녀가 찍은 도서관 공연장 미술관… 
어디서도 사람의 모습 찾을 수 없어 비어있다고 느끼는 순간 새삼 가득참을 깨닫게 돼 
세계적인 사진 거장 칸디다 회퍼가 자신의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는 국제갤러리의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세계적인 사진 거장 칸디다 회퍼가 자신의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는 국제갤러리의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처음부터 공간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인간이 어떻게 공간을 구성하는지 관심을 갖게 됐어요."

텅 비어있는 오페라극장의 내부. 때때로 그곳은 밤마다 관객으로 가득찼을 것이다. 화려한 조명이 내리쬐고 오페라 가수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뽐내는 어느 저녁, 관객들의 박수소리와 열기로 가득찼을 그곳은 낮에는 전혀 다른 적막감과 온도를 드러낸다.

누군가가 학구열을 불태웠을 도서관도 그의 사진 속에선 비어있다.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비어있다고 느끼는 순간 갑자기 그 공간이 새삼 가득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미 그곳은 나란히 늘어선 책장마다 책으로 가득했는데 비어있다 착각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림 하나 만으로도 아우라를 내뿜는 미술관. 그의 사진 속에선 이 공간마저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을 스쳐지나갔을 수많은 이들의 흔적과 온기가 느껴지는 것은 프레임 밖에 서있는 작가, 칸디다 회퍼의 세밀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비어있는 공간 속에 투영된 시대와 사람의 흔적에 주목했던 칸디다 회퍼(74). 그의 작업들이 다시 한국의 관람객을 찾아왔다.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오는 26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의 주제는 '깨달음의 공간(Spaces of Enlightenment)'이다.

칸디다 회퍼 'Teatro Cervantes Buenos Aires'
칸디다 회퍼 'Teatro Cervantes Buenos Aires'

지난 50여년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공간과 인간을 사유해 온 칸디다 회퍼의 작품들 중에서도 1990년대 말부터 근래까지 촬영된 '공연장', '도서관', '미술관' 등의 작품이 이번 전시에 걸렸다. 전시장의 1층은 뒤셀도르프 시립극장을 시작으로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아르헨티나의 극장과 오페라하우스의 내부 공간을 담은 작품으로 구성됐다. 이들 공간은 다양한 건축 양식은 물론 시대적, 사회적 변화를 가늠하게 한다. 예컨대 명문가의 사유지에 마련됐던 개인 극장, 닫힌 공간을 더 넓고 깊게 보이도록 원근법을 이용한 설계 방식, 공공 기금을 통해 건립되고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설 극장은 이전 왕족과 귀족에 국한됐던 음악과 청중의 존재가 계몽시대 중간계급의 부상과 맞물려 확대되고, 공적 기관의 설립 및 대중화로 이어진 일련의 역사를 대변한다. 귀족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박스석, 일반 청중들이 대부분 서서 관람하던 오늘날의 스톨석과 같은 '파르테르'의 구성과 비교해 이후 파르테르에 의자가 설치되고 나아가 공간의 계급적 분할이 사라지는 변화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전시장의 2층에서는 인간의 지적, 심미적 추구의 장으로 한데 묶일 수 있는 도서관과 미술관의 공간들이 소개된다. 중세 수도원 내 바로크 양식의 도서관, 프랑스국립도서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내 복도에 놓인 작은 서가, 에르미타주미술관과 율리아 슈토셰크 컬렉션 등 작품 속 내부 공간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곳에 머물고 스쳐간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인문학적 장소로서의 역할을 획득했다. 특권계층을 위한 곳에서 민주화된 문화의 장소로 바뀌게 된 이러한 공간들은 무수히 많은 예술가, 역사학자, 철학자들이 청중, 관객과 교류했고 이 과정에서 생긴 인식의 변화는 깨달음으로, 더 나아가 예술 창작의 위대한 순간으로 이어졌음을 시사한다.


50여년 꾸준히 사진가라는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는 이번 전시와 관련해 "공간 속에 되도록 사람의 모습을 담지 않으려 했다"며 "사람이 비어있는 공간과 프레임 안에 들어오면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게 되기에 오히려 그 공간 자체를 왜곡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비어있는 공간 속에서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상상과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싶었던 셈이다.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 그 안에 드나들었던 이들이 누구였을까를 역으로 상상하게 하는 그의 작품들은 가볍게 훑으면 매우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오래 볼수록 그 안에서 그 공간을 만들었을 시대와 사상을 읽을 수 있어 묘미가 있다.

"저는 공간 자체가 사회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없는 공간이지만 그 공간을 거쳐간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대에 따라 다른 수많은 건축물의 내부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마저 드러내는 것 같아요. 과거에 지어진 공간과 건물은 그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현대에 새롭게 지어진 건물은 앞으로 쌓아갈 미래를 볼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