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차장 칼럼]때론 '덜 나쁜 선택'이 옳다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0.10 16:41

수정 2018.10.10 16:41

[차장 칼럼]때론 '덜 나쁜 선택'이 옳다


어린 시절 무협지를 무척 좋아했다. 친구들이 당시 한창 유행하던 국산 '판타지' 소설에 심취해 있을 때도 난 무협지만 붙잡았다. 그 당시 동네마다 책대여점이 여기저기에 많았다. 그 덕분에 권당 몇 백원만 내면 언제든 무협지를 빌려다 읽을 수 있었으니 그만큼 값싸고 쉽게 즐길 수 있는 여가거리가 없었다.

칼끝에 목숨을 걸고 무와 협을 이야기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항상 가슴을 설레게 했다. 무협지 속 무사들의 삶에서 가장 멋졌던 것은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팔 하나쯤은 과감히 희생하는 그들의 결단력이었다.


'이대도강'. 원래는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해 넘어진다는 뜻의 고사성어인데, 작은 손해를 보고 큰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무협지 속 무사들이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한다"고 외치며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쏟아지는 칼날 속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장탄식을 내뱉고는 했다. 훗날 커서 사회에 나오고 난 뒤, 어른으로 현실에서 산다는 것 또한 무협지 속 무사들 이상으로 살벌한 결정의 연속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항상 최선의 선택만으로 삶의 궤적을 이어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가장 좋은 선택보다 덜 나쁜 것을 골라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삼성중공업이 최근 조선 3사 가운데 처음으로 올해 임금단체협상을 매듭지었다. 그것도 묵혀뒀던 2년치를 포함, 총 3년치의 협상을 한번에 마무리지었다. 올 초부터 노사 양측의 간극이 너무 커 추석이 다 되어서까지 합의가 안 끝날 것 같았는데 일이 되려니 한번에 성사되기도 하나보다.

올 들어서 조선업 경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는 게 중론이다. 수주 소식도 자주 들리고, 한동안 중국에 빼앗겼던 전 세계 발주량 1위도 수개월째 한국이 차지하고 있다. 조선업계 노사가 시끄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아직 어려우니 임금을 반납하라는 사측과 이제 수주도 들어온다는데 임금을 올릴 때가 됐다는 노조 측이 칼을 맞대고 있는 형국이다.

삼성중공업이 1년치도 아닌 3년치를 한번에 타결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험난한 칼싸움에서 각자 덜 나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의 노동자협의회는 임금인상에서 동결로 한발 물러나는 대신 고용안정 약속을 받아냈다. 내일 월급이 올라도 모레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나가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금 받는 월급이라도 오래 지키자는 생각을 다들 했을 것이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서 조선 '빅3'가 올해 모두 수주목표치를 못 채울 가능성이 있다.
언제 인력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다. 노조나 회사 어느 한쪽만 이길 수는 없는 싸움이다.
노조가 '덜 나쁜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남았을지도 모른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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