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20년 집권이 뉘 집 애 이름인가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2.03 17:09

수정 2018.12.0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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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같은 우직함은 이제 그만
英 노동당 '제3의 길'처럼 여우 같은 진보를 보고 싶다
[곽인찬 칼럼] 20년 집권이 뉘 집 애 이름인가

영화 '워터프론트'(1954년작)는 배우 말론 브란도를 세상에 알렸다. '대부'와 '지옥의 묵시록'이 중년의 브란도라면 '워터프론트'는 청년 브란도다. 영화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었다. '워터프론트'는 위대한 영화 톱10에 단골로 든다. 주인공 테리(브란도)는 부두 노동자다. 여기선 노조위원장 프렌들리가 왕이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노조원들은 못 본 척 눈을 감는다. 물정 모르는 신참 테리가 감히 반기를 든다. 동료 노조원을 살해할 때 자신이 미끼 노릇을 한 게 끝내 마음에 걸려서다. 테리마저 죽이려 드는 프렌들리, 그에 맞서는 테리. 테리는 반범죄위원회에서 프렌들리의 죄상을 낱낱이 증언한다. 그제서야 동료들도 폭군 노조위원장을 버리고 진실을 밝힌 테리 편에 선다.

요즘 민주노총 관련 기사에 '군림'이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 좋은 징조가 아니다. 지난주 자동차 부품사 유성기업에서 터진 유혈 폭력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마저 "이런 일이 절대로 다시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민노총 간부들이 영화 '워터프론트'를 함께 보면 좋겠다.

이해찬 대표는 2일 취임 100일을 맞았다. 이 대표는 줄기차게 진보 20년 집권론을 편다. 지난주 당원 토론회에서 "정조대왕 돌아가신 1800년 이후에 제대로 된 개혁·민주 세력이 집권한 건 딱 10년밖에 없다"며 "이번 기회를 놓치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5년 단임제 아래서 20년 집권하려면 대통령을 연달아 네 번 배출해야 한다. 글쎄다. 살기등등한 강성 노조, 한풀 꺾인 최근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을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렇다고 아주 허황된 꿈은 아니다. 네 번은 몰라도 세 번은 길이 보인다. 그 예를 영국 노동당에서 찾을 수 있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신노동당의 깃발 아래 10년 동안(1997~2007년) 권력을 잡았다. 이어 같은 당의 고든 브라운 총리가 3년(2007~2010년)을 더 했다. 합해서 노동당 집권 13년이다. 비결이 뭘까.

다 아는 대로 블레어는 '제3의 길(The Third Way)'을 걸었다.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교수의 지론이다. 기든스는 노동당 정부에 대해 "누가 보수파라고 부르더라도 겁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요컨대 제3의 길이란 보수정책을 펴는 노동당이다. 미국에선 민주당 빌 클린턴 대통령이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블레어와 클린턴은 레이건·대처 식의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정부가 시장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도 옳지 않다고 봤다.

한국 진보세력은 우직함을 좋아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에 노공이산이란 필명을 썼다. 한 노인이 산을 옮기겠다고 덤빈 우공이산(愚公移山)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조국 민정수석은 얼마 전 페이스북에 "호시우보(虎視牛步), 우보만리(牛步萬里) 하겠다"고 썼다. 시간이 걸려도 소처럼 뚜벅뚜벅 길을 가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시장에 우직하게 간섭한다.

나는 한국 진보세력이 우직한 소가 아니라 차라리 영악한 여우이면 좋겠다. 1차 소 실험은 참여정부에서 실패로 끝났다. 문 대통령은 유능한 진보를 꿈꾼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은 아무리 봐도 소 실험 시즌 2다. 배신자 낙인이 두려워서일까, 한국 진보층에선 토니 블레어 같은 인물을 찾을 수 없다.
이래서야 집권 20년은커녕 영국 노동당의 13년 집권도 신기루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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