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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로] 이국종의 투혼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2.23 17:22

수정 2018.12.23 17:22

[윤중로] 이국종의 투혼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의 '골든아워'가 문화부로 배달된 것은 지난 10월쯤이었다. 두 권짜리 이 두툼한 책은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출판담당기자는 "이런 책이 나왔네요"라며 작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 책을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책은 한동안 문화부 서가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책에 대한 소식이 연이어 전해졌다. '이국종의 골든아워, 여성 독자들 호응' '골든아워 인기 급상승, 톱 10 진입' '골든아워, 빠른 속도로 선두권 위협' 같은 기사들이 올라오더니, 급기야 출판인 92명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모든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일 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서 읽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였다.

책은 비교적 쉽게 잘 읽혔다. 이국종은 스스로를 '전형적인 이과(理科) 남자'라고 칭하며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슬쩍 내비치기도 했지만, 그가 맞닥뜨린 냉혹한 현실과 병원의 일상, 외상센터를 찾아온 환자들의 사연 그리고 이른바 '칼잡이(외과의사)'로서의 고뇌와 사색이 문장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특히 지난 2011년 1월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한국 화물선 삼호주얼리호 선원 21명을 구출한 '아덴만 여명 작전'과 그 과정에서 여섯발의 총탄을 맞은 석해균 선장을 기적적으로 살려낸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박진감 넘치게 읽혔다.

책을 다 읽고나서 나는 두 개의 단어를 떠올렸다. 고군분투(孤軍奮鬪)와 투혼(鬪魂). 고군분투라는 말에는 그가 중증외상센터의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인 지난한 과정이, 투혼이라는 말에는 어쩌면 끝내 이뤄내지 못할지도 모를 그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그의 올곧은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이국종은 어두운 복도 끝에 있는 수술방을 '막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곳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건져올리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칼질을 했다. 살려낸 환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병원의 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역설이 늘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그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출구를 열어가며 돌파해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자세를 존중했다"고 이국종은 책에 썼다. 그의 말마따나 그곳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투혼이라는 말은 '다걸기(올인)'로 번안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다걸고 한 번 해보는 것. 그 시도가 끝끝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해보는 것과 해보지 않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가망이 없을지도 모르는(시쳇말로 잘해야 본전인) 아덴만 여명 작전에 그가 기꺼이 뛰어든 것도 아마 그런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문득 이순신을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 있다. 12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과 맞서 싸워야 했던 이순신처럼 이국종의 신세가 꽃놀이패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제로에 가까운 중증외상센터의 지속가능성을 붙들고 사투를 벌였다. 그것은 실패와 반복의 연속이었다. 될듯 될듯 되지 않았고, 때론 허망한 결말을 맞이해야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업(業)의 본질로 받아들였다.
깨지고 찢어지고 으스러진 환자들의 몸을 자신의 칼 끝에서 다시 세워놓는 일, 그는 그걸 멈출 수 없었을 뿐이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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