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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로] 쿠르드족의 비극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1.06 16:47

수정 2019.01.06 16:47

[윤중로] 쿠르드족의 비극

15년은 된 것 같다. 동네 비디오가게 맨 구석진 자리에서 나는 처음 이 영화 제목을 봤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취한 말들이라니. 대체 왜 취한 거지. 그럼, 말들이 주인공인가. 그저 낯선 타이틀에 끌려 무작정 빌렸고, 집 소파에 드러누워 영화를 틀기 직전에서야 이란 명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조감독 출신 바흐만 고바디의 작품이라는 걸 알았다.

이란·이라크 국경 산악지대 가난한 마을. 막내를 낳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지뢰를 밟아 갑자기 죽은 아버지, 아기 상태로 성장이 멈춘 형을 대신해 가장이 된 12세 소년 아윱의 고단한 삶을 카메라는 쫓아간다. 아윱은 밀수꾼을 따라 노새를 끌고 눈발 날리는 국경을 넘어 생필품을 실어나른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라고 노새들에겐 술도 먹인다.
그런데 그날은 실로 살인적 날씨였고, 평소보다 많은 술을 노새에게 먹이게 된다. 매복한 무장강도의 기습에 일행은 혼비백산 도망치지만, 형의 수술비를 위해 노새가 절실한 아윱만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새하얀 눈밭 위에 널브러진 노새를 향해 일어나라 울부짖는 아윱을 보는 일은 고통이었다. 내 생애 비디오를 보며 그렇게 운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쿠르드족 출신 첫 영화감독 바흐만 고바디. 그는 후속 여러 영화를 통해서도 쿠르드족의 비애를 세계에 알렸다.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 등 산악지대에서 3000년 전부터 삶을 이어왔으면서도 단 한 번 독립된 나라를 갖지 못한 비운의 민족. 이들 인구는 이제 4000만명에 이른다. 그간 독립의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니었으나 그때마다 열강의 배반은 똑같이 반복됐다. 이런 좌절의 연속에도 그들은 이번만은 다르리라 믿었을 것이다.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고 간 극단주의 이슬람세력(IS)과 서방 연합군이 벌인 지난 수년간 전투에서 최고 공로자는 누가 봐도 쿠르드민병대 인민수비대(YPG)였다. 미군의 대리전을 도맡으며 최악의 고비마다 결정적 승리를 안긴 YPG 활약을 국제사회는 묵묵히 지켜봤다.

이들의 질긴 꿈을 산산조각 부숴버린 마지막 한 방은 지난해 연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윗 한 줄에서 나왔다. 잔당들과 마지막 교전이 한창인 상황에서, 난데없는 승리선언과 철군 트윗이라니. 트럼프는 미국 의회의 거센 항의에 시리아 철군 속도를 조절하겠다고 톤을 낮추고 있지만, 이미 중동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가고 있다. 눈엣가시였던 미군이 빠지면서 비로소 쿠르드족 섬멸이 가능해진 터키는 연일 강공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이런 위협 속에 과거 적대관계이던 반미 시리아 정부군과 YPG는 전격 손을 잡았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터키의 대학살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이런 의례적 멘트가 무슨 희망이 될까.

트럼프의 '철군 트윗'은 지극히 우발적이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왜 그렇게 혼자 급히 결정한 것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그 직전 상황은 뮬러특검과 검찰의 전방위 수사로 트럼프의 심적 압박이 극에 달했을 것이라는 추정 정도다. 단 한 줄 트윗에 국제정세와 금융시장이 요동쳤으니 국면전환에는 성공했다고 봐야 하나.

걱정스러운 대목은 이런 트럼프 리스크가 이제 비로소 시작이라고 보는 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모습이 가장 트럼프스럽다는 분석마저 미국 전문가들은 내놓고 있다.
2020년 재선 캠페인은 이미 닻을 올렸고, 특검의 칼날은 절정으로 치닫는 중이다. 이후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트럼프의 통상·안보 카드들은 언제, 어떤 형태로 던져질지 알 수가 없다.
트럼프 리스크를 최소화할 비장의 프로젝트가 우리 내부에서도 이미 실행 중이기를 바랄 뿐이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글로벌콘텐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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