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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개헌 꺼낸 일본 총리, 간염이 재발했다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2.06 13:14

수정 2019.05.18 04:05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2] 이마무라 쇼헤이, <간장선생>
영화 포스터 /사진=fnDB
영화 포스터 /사진=fnDB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와 있던 2차대전 말미, 일본의 어느 해안마을에 하얀 신사복에 밀짚모자를 쓴 채 왕진용 가방을 들고 달리는 의사가 있다. 그의 이름은 아카기(에모토 아키라 분). 이 해안마을의 유일한 내과개업의다.

아카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간장선생으로 불리는데 이는 아카기가 자신이 진료하는 모든 환자를 간염이라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팔이라 놀려대는 이들 앞에서 아카기는 묵묵히 제 일을 해낼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카기에게 실려온 한 어부가 급성 간염으로 죽는 일이 발생한다. 죽기 직전 그는 아카기에게 자신의 딸이 더 이상 창녀노릇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며 부탁한다.
이런 연유로 아카기의 간호사로 들어오는 인물이 소노코(아소 구미코 분)다.

■거룩한 창녀와 눈 밝은 의사

영화 한 장면 /사진=fnDB
영화 한 장면 /사진=fnDB

소노코는 무책임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몸을 팔던 소녀다. 이런 점에서 그녀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소냐와 같이 구원자적인 '거룩한 창녀'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는 그녀가 전쟁에 동원되는 옛 친구를 위해 그와 공짜로 행위를 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소노코는 과거 어부였던 아버지가 몸을 다쳐 가정의 생계를 꾸리기 힘들게 되자 게이샤로 나가 돈을 벌어온 어머니로부터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받지 말고 몸을 주라'는 조언을 들은 일이 있다. 이후 그녀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단단히 지켜왔는데 영화는 그런 그녀가 '좋아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옛 친구를 위해 자신의 규칙을 깨는 장면을 관객 앞에 보여준다. 관객은 그로부터 더 이상 소노코를 단순히 몸을 파는 창녀로 천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시는 어느 누구도 남을 돌보지 않고 제 안위만을 생각하던 시대다. 힘 있는 남자들이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 다른 누구를 죽이거나 상처 입히고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보면, 창녀와 간호사로서 보여준 소노코의 모습은 마치 창녀의 모습을 한 성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공인 아카기는 의술을 통해 직접 사람들을 구원하는 의사다. 그는 전시의 열악한 환경에서 유행하는 간염을 박멸하기 위해 살신성인한다. 의사는 항상 뛰어야 하고 다리가 없으면 기어서라도 환자에게 가야한다는 그의 신념은 영화를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하나뿐인 아들을 관동군 군의관으로 보내고 혼자서 마을을 지키겠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카기를 보라. 그는 군의관이 환자들을 유행성 전염병인 티푸스라고 진단할 때도 간염이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전시에 늘 부족한 약품인 포도당을 환자들에게 충분히 주사하면서, 그저 푹 쉬고 잘 먹으라는 처방을 내리는 소신 있는 의사가 바로 그다.

마을사람들과 군의관은 한 명의 노동력도 아까운 전시에 정부정책에 거슬리는 행동을 일삼는 아카기를 아니꼽게 본다. 하지만 아카기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보인다. 어느날 우연히 현미경을 얻은 그는 탈주한 네덜란드 포로 피터(자크 갬블랭 분)의 도움을 받아 간염의 원인을 찾는 연구에 돌입한다.

그런 아카기에게도 흔들리는 순간이 온다. 심장이 약했던 어느 할머니의 왕진 요청을 무시한 채 연구에만 골몰하다 그 할머니가 죽고 말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후 아카기는 개업의로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고민하고, 마침내 현미경을 내던지고 일선 의사로 복귀하기에 이른다. 간염의 원인을 밝히는 일보다 마을사람들을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의사이길 선택한 것이다.

■전체주의를 간염에 빗대다

영화 한 장면 /사진=fnDB
영화 한 장면 /사진=fnDB

간염이 가지는 의미는 주목할 만하다. 아카기가 그토록 박멸하고자 노력했던 이 병은 영화 내내 군의관들이 진단하는 티푸스와 대립된다. 아카기를 돌팔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마을에 창궐하는 질병을 티푸스라 믿고 군의관들의 처방에 따른다. 이들은 군에서 주장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서 아카기를 무시하고 아니꼽게 여기기 일쑤다.

반면 아카기의 진단을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사회가 배척하는 이들이다. 몰핀 중독자인 외과의사, 알콜중독자인 승려, 2대째 창녀일을 하는 어린 소녀,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술집 마담이 바로 그들. 이들은 소위 정상인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극히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그런 시선을 호쾌하게 비웃는다. 누구보다 용감하고 정 깊은 창녀와 술집 마담을 통해서 기존의 정조 관념을 비틀고, 군복을 입은 작달막한 세탁소 주인을 통해서 전쟁놀음의 비참함을 강조하며, 주인공 아카기를 통해서는 부질없는 소명의식을 비웃어 버리는 것이다.

티푸스와 간염의 관계는 전체주의와 그 폐해를 상징한다. 당시 군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은 전체주의적 입장아래 모든 국민을 전방의 군사로 또는 후방의 보급부대로써 역할을 담당하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지 못한 국민들은 국가에 속아 전체주의라는 헤어나기 힘든 늪에 빠져들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이러한 상황을 간염이라는 질병으로 빗대어 표현한다. 군부는 간염의 만연을 단지 유행성 질병에 불과한 티푸스라고 속이고, 대부분의 국민은 이에 속는다. 하지만 오직 아카기 만은 이 병을 유행성질병이 아닌 만성질병 간염으로 진단하고 사람들을 치료하려 든다. 전체주의에 대항하고 진실을 찾아가는 인물로서의 성격을 내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은 피터가 탈주에 실패한 후 일본 병사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일본 병사는 피터를 심하게 구타하며 "대일본은 영원하다!"라고 외치는데, 피터는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서 이렇게 읊조린다.

"너는 온몸이 간염에 오염 되었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카기는 히로시마에 우라늄폭탄이 떨어지고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렇게 말한다. "저 구름은 전쟁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구름의 모습은 곧 간이 부은 사람의 모습처럼 형상화되는데, 이 역시 간염이 전쟁에 의해 발생했고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고개 드는 간염의 징후

영화 한 장면 /사진=fnDB
영화 한 장면 /사진=fnDB

소노코와 아카기가 왕진을 다녀오다 고래를 발견하는 장면도 인상깊다. 이 장면은 소노코와 아카기의 인간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소노코는 고래를 잡기 위해 온몸을 던져 따라간 반면, 아카기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자하며 물에 빠진 뒤에도 두려워서 배를 잡은 채 떨기만 한다.

고래를 꿈과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아카기의 이런 모습은 벽을 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해버린 의사로, 소노코는 자신의 상황에서 최대한 이상을 실현시키려 적극적으로 달려든 여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5일 후지산케이 그룹이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해 "자위대는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서 신뢰받는 조직이 됐다"면서 "이번에는 정치가 책임을 다할 때"라고 언급했다.
그는 헌법에 대해서도 "확실히 논의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는 길로 이어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전후 대외적인 무력을 포기하겠다 선언한 평화헌법 제9조에 자위대의 존재를 명기하는 내용의 개헌을 추진하고 있는 아베 총리의 야욕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전후 일본이 낳은 가장 찬란한 유선을 아베 총리와 자민당이 뒤엎으려는 지금,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이 영화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조용히 생각해본다.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에서 김성호 기자와 동료들이 나누는 더 깊은 영화이야기를 만나보세요!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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