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뒤로 가는 금융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3.25 17:38

수정 2019.03.2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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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정부 혁신금융은 박근혜정부 때 기술금융
규제혁파 없인 말짱 헛일
[곽인찬 칼럼]뒤로 가는 금융

2008년 10월 이명박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을 했다. 미국발 금융위기 탓에 경제는 엉망이었다. 이 대통령은 기업인 시절에 은행한테 당한 일을 이야기했다. "석유파동 때 멀쩡한 기업들이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구하지 못해 쓰러지는 걸 많이 봤다"며 "비가 올 때는 우산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제 소신"이라고 말했다.

11년 뒤 이 말을 문재인 대통령이 반복할 줄은 몰랐다. 문 대통령은 지난주 혁신금융 비전 선포식에서 "그동안 금융에 대해 '햇볕 날 때 우산을 빌려주고 비 올 때 우산을 걷어간다'는 뼈아픈 비판이 있었다"며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강산은 변했지만 은행은 그대로다. 두 대통령이 증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금융 보신주의를 틈날 때마다 질타했다. 창조경제를 뒷받침할 기술금융에 힘을 쏟았다. 당시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기술금융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금융인으로서 역사적 사명이 없는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은행연합회 홈페이지에는 기술금융 상황판이 설치됐다. 지난주 문 대통령은 "제2 벤처붐 확산을 위해서는 도전을 응원하는 금융, 혁신을 장려하는 금융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금융이 혁신금융으로 바뀌었을 뿐 은행은 달라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제일 나았다. 자본시장통합법(현 자본시장법)을 만든 것도 참여정부다. 증권, 자산운용, 선물, 투자자문업을 하나로 묶었다. 이 법은 이명박정부 시절이던 2009년 2월에 시행에 들어갔다. 자본시장법을 만들었다고 '한국판 골드만삭스'가 뚝딱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 덕에 골드만삭스 꿈이라도 꿀 수 있게 됐다.

동북아 금융허브의 꿈을 키운 것도 노무현 대통령이다. 2005년에 1차, 2007년에 2차 금융허브 회의를 주재했다. 노 대통령 스스로 금융허브 도약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1차 회의에서 "금융허브화가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금융허브화에 관계없이 우리 금융산업이 발전해야 우리 경제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길을 닦아놓은 덕에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서울 여의도와 부산 문현을 양대 금융중심지로 지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금융중심지 정책은 순수 국내용이다. 세상 누구도 서울과 부산을 금융허브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금융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다. 무사안일이라고 해도 좋다. 그저 좁은 국내시장에서 손쉽게 돈을 버는 데만 열중한다. 금융의 삼성전자? 어림없다. 삼성전자는 해외매출 비중이 90%에 육박한다. 예나 지금이나 은행은 골목대장이다. 세계는 고사하고 동북아 금융허브의 주역이 되겠다는 꿈도 접은 지 오래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한 전직 고위관료는 정책의 판단기준을 글로벌과 로컬, 둘로 나눠 설명한다. 우버를 쫓아내고 카풀을 막은 것은 판단기준을 오로지 로컬에 두었기 때문이다. 국내 은행은 대표적인 로컬산업이다. 은행들은 정부 정책에 순응하는 대가로 안락한 삶을 누린다. 정부도 고분고분한 은행을 원한다. 그러니 누가 애써 혁신금융 같은 모험을 감수하겠는가.

이명박이 한 말, 박근혜가 한 말을 문재인 대통령이 또 한다. 이게 한국 금융의 현주소다.
노무현 때는 뭔가 바꾸려고 안간힘을 쓰기라도 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퇴보다.
정부가 규제개혁 없이 혁신금융을 바라는 것은 마치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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