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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우려되는 한·일 관세전쟁 위기

안삼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4.09 17:24

수정 2019.04.09 17:24

[여의나루] 우려되는 한·일 관세전쟁 위기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는 없다"고 독일과의 전쟁을 앞두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최근 '관제민족주의' '국가민족주의'를 염려하는 지성인이 많다. 과거 80년 혹은 110년 전의 가슴 아픈 역사를 다시금 '친일잔재청산'이라는 명분으로 부각시켜서 국민에게 반일감정과 분노감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지난해 일본 강제징용 근로자의 보상판결이 발단이 된 과거사 문제가 최근 일본 전범기업의 전범 딱지와 불매 추진, 친일음악가 작곡의 학교 교가 교체검토 등 일본 국민의 자존심이나 국가에 대한 배려 없이 경쟁적으로 반일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일본 우익단체들의 한국산 물품 300% 관세부과 맞불 피켓시위, 정부 고위층의 공공연한 한국산 물품에 대한 관세인상, 반도체 소재의 수출규제, 한·일 경제단체 회의 무산, 경제보복 발언 등 한·일 양국의 경제갈등이 심각하다.

과거 조선과 일본의 교역의 역사를 다시 살펴본다.
조선은 외국과 교역금지, 주민의 해외이주 금지 등 쇄국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예외적으로 임진왜란 이후 1609년 광해군 시대에 지금의 부산 초량진에 왜관을 설치하고 대마도와 교역을 재개했다.

일본도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집권하면서 초기에는 포르투갈과 교역,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다가 쇄국정책으로 전환했다. 이후 제한적으로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와 교역을 허용해 '란학(蘭學)'(네덜란드는 화란임)이라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근세 일본은 1854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계기로 쇄국정책에서 벗어난 후 1867년 메이지유신으로 막부체제에서 천황체제로 복귀 후 서구 국가와 같은 통일국가로 근대화했다. 일본은 1876년 군함을 보내 조선과 강화도조약과 부속협정으로 통상장정을 체결했다.

당시 조선의 조약 대표는 신헌이라는 무관 출신이다. 신헌은 협상장에서 일본 대표에게 "조약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일본 대표는 "상대방 국가에 관을 설치해 서로 교역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조약과 국제규범에 무지한 조선은 일본이 준비해온 초안을 그대로 승인했다. 일본 안은 관세부과 규정이 없고,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서 범죄 시 치외법권 인정, 물품 거래 시 일본화폐 사용 등 일본이 미국과 최초로 맺은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가져왔다.(당시 일본은 조선이 관세부과 요구 시 5% 과세안을 준비해 왔다고 한다.)

조약 체결 후 조선 대표 신헌은 고종에게 큰 칭찬을 듣고 승진까지 했다. 조선은 추후 일본과 체결된 조약에 재정수입 확보에 필요한 관세규정이 없는 것을 뒤늦게 알고 1878년 9월 부산 두모진에 해관을 설치하고 일본 물품에 관세를 부과했다. 일본의 조약 위반이라는 강력한 항의를 받고 최초의 세관인 두모진 해관은 3개월 후 폐지된다. 관세 부과는 1883년에 일본과 통상협정을 개정, 5% 관세를 부과했다.

경제문제는 개인 사이에서는 관용과 양보가 가능하나 국가 간에는 힘의 논리가 적용될 뿐이다. 현재 일본은 세계 3위 경제대국이자 특허·기술 강대국이다.


우리는 20년 전 마늘재배 농가를 보호하고자 중국산 마늘에 관세를 인상한 후 '되로 주고 말로 돌려받는 우'를 범했는데 현재 일본과 경제문제 해결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겠다.

우리 정치인들이 무한 경제전쟁 시대에 국내정치와 국제관계는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세계 4대 초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과 외교력이다.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前관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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