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국가채무 비율 40%는 성역인가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5.20 16:57

수정 2019.05.20 16:57

사회안전망 촘촘히 짜려면 정부가 지금보다 돈 더 써야
다만 재정준칙부터 세우길
[곽인찬 칼럼] 국가채무 비율 40%는 성역인가

독일인들은 빚을 무지 싫어한다. 그래서 여전히 신용카드보다 현금을 선호한다. 굳이 카드를 써야 한다면 신용카드보다 체크카드다. 왜 이런 '짠돌이'가 됐을까. 약 100년 전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뼈아픈 교훈이 됐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정부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독일 중앙은행은 돈을 마구 찍었다.
그 바람에 마르크화는 휴지 조각이 됐다. 빵 한 덩어리 값이 2000억마르크까지 치솟았다. 이 일이 있은 뒤 독일은 긴축의 전사가 됐다.

나랏빚도 깐깐하게 관리하는 편이다. 2015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독일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79%다. OECD 평균(74.9%)을 살짝 웃돌지만 110~180% 수준인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그리스 등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하면 우등생이다. 미국(136.6%), 일본(237.1%)과 비교해도 한결 낮다.

하지만 이런 독일도 한국에 비하면 족탈불급이다. 2015년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은 37.9%에 그쳤다. 지난해 이 비율은 38.2%로 조금 높아졌을 뿐이다. OECD 32개 회원국을 빚쟁이 순서대로 세우면 한국은 26번째다. 요컨대 선진국 클럽인 OECD 안에서도 한국의 재정건전성은 독보적이다. 장하준 교수(영국 케임브리지대)는 이런 한국의 재정정책을 '자린고비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우리 경제관료들에게 국가채무 비율 40%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재정전략회의에서 "재정의 과감한 역할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내년 예산안을 더 넉넉히 짜라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혁신적 포용국가를 위한 예산은 소모성 지출이 아니라 경제·사회 구조 개선을 위한 선투자"라고 강조했다. '포용국가'라는 정치적 표현이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소모성 지출이 아니라 선투자라는 데는 공감한다.

많은 이들이 노동시장을 개혁해야 한다거나 귀족노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현 복지구조 아래선 아무리 떠들어봐야 입만 아프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장하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안전망이 있어야 새로운 선택도 하고, 직업도 바꿔보는데 한국엔 그게 없어요. 핀란드, 스웨덴 같은 데는 실업급여가 최종 월급의 60~70%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구조조정이나 기술혁신에 저항이 별로 없어요."(경향신문 2019년 1월 14일자).

우리는 일자리를 잃는 순간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사회안전망이 허약해서다. 그러니 해고에 피 터지게 저항한다. 만약 문 대통령이 이 살벌한 구조를 바꾸는 데 예산을 더 쓴다면 나는 찬성이다. 세금을 조금 더 낼 의향도 있다.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짜는 바람에 국가채무 비율이 40%를 돌파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짠돌이 독일의 국가채무 비율이 우리보다 두 배나 높다는 사실이 위안을 준다.

그 대신 문 대통령에게 당부한다. 재정건전성은 나라 경제를 떠받치는 버팀목이다. 외환위기, 금융위기 때도 그 덕을 톡톡히 봤다. 재정을 더 쓸 순 있지만 막 쓰면 안 된다. 2006년에 제정된 국가재정법은 '정부는 건전재정을 유지하고…국가채무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86조)'고 규정한다. 이 정도론 부족하다.
좀 더 확실한 재정준칙이 필요하다. 국가채무 비율 한계선을 숫자로 못 박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런 장치 없이 재정을 더 쓰겠다고 하면 여론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