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안중근 의사, 하얼빈 거사부터 사형까지'...러시아 신문기사 24건 최초 공개

안태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5.28 15:20

수정 2019.05.28 15:29


'보스토치나야 자랴' 신문의 1909년 10월 22일 자 신문. 일본 영사관에서 진행된 심문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것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며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쁘며, 자신의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고 발언한 내용을 보도했다. / 제공=행정안전부 국기기록원 제공
'보스토치나야 자랴' 신문의 1909년 10월 22일 자 신문. 일본 영사관에서 진행된 심문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것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며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쁘며, 자신의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고 발언한 내용을 보도했다. / 제공=행정안전부 국기기록원 제공

28일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국가기록원의 나라기록관에서 진행된 정책설명회에서 김형국 국가기록원 연구협력과장이 지난 2015년부터 수집한 안중근 의사 관련 러시아 극동 지역 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안태호 기자
28일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국가기록원의 나라기록관에서 진행된 정책설명회에서 김형국 국가기록원 연구협력과장이 지난 2015년부터 수집한 안중근 의사 관련 러시아 극동 지역 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안태호 기자
안중근 의사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과 발언 내용을 소개한 러시아 극동 지역의 신문기사 24건이 최초 공개됐다. 하얼빈 의거부터 일제의 심문, 사형집행의 구체적인 묘사와 함께 러시아의 상황인식 등을 담고 있어 향후 안 의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28일 설립 50주년과 공공기록물법 제정 20주년을 맞아 성남 국기기록관에서 정책설명회를 열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하바로프스키 등의 지역신문이 보도한 안중근 의사 관련 기사 24건을 공개했다.

국가기록원이 2015년 러시아 극동지역을 대상으로 사료를 수집하던 중 발굴한 것으로 안 의사 의거일 다음 날인 1909년 10월27일부터 1910년 4월21일까지의 보도 내용이다.


직접 기사 발굴업무를 수행한 김형국 국가기록원 연구협력과장은 “당시 러시아 지역사회에서의 안 의사에 대한 인식 등을 볼 수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며 “안 의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사람으로 표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 신문은 하얼빈 거사를 위해 떠나는 안중근과 동료 우덕순, 조도선이 눈물을 흘리며 큰 절로 인사하는 장면까지 르포 형식으로 기사화했다. ‘쁘리 아무리예’ 신문의 1909년 11월2일자 보도다. 이어 일본 총영사관에서 진행된 첫 심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고문도 두렵지 않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라는 안 의사의 진술도 상세히 실었다.

안중근 의사의 법정진술과 사형선고 당시의 상황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안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된 2월26일 재판 상황을 보도한 ‘쁘리 아무리예’ 신문 1910년 2월27일자에 따르면 안 의사는 1시간 동안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고 보도했다. 조국을 위해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이하라는 안 의사 어머니의 마지막 인사말도 전했다.

특히 안 의사의 매장지와 관련된 보도가 주목을 끈다.
‘우수리스까야 아끄라이나’ 신문 1910년 4월21일자는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직후 교도소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고 보도했다. 종전까지 안중근 의사의 매장지는 교도소 내의 묘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소연 국가기록원장은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 의거에 대한 러시아의 인식뿐만 아니라 의거 준비, 체포와 일본영사관 인계과정 등 사후 조치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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