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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역사와 리더십

안삼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06 17:02

수정 2019.06.06 17:02

[여의나루] 역사와 리더십

며칠 전 친구들과 서울 정동 일대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정작 서울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치기 마련인 서울 한복판을 둘러본 시간이었다. 성공회 대성당, 영국 대사관에 막혀 있던 곳을 이은 덕수궁 돌담길, 고종의 길, 러시아 공사관 터,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등. 접하는 장소마다 역사적 의미를 새기다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 최근 만들어진 고종의 길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대사관저를 옆에 두고 옛 러시아 공사관 터까지 이어지는 그 길은 우리나라의 비운의 역사를 상징한다. 아관파천 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던 길이라고 한다.
실제로 고종이 그 길을 걸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 공관으로 피신해야 했던 사실 자체가 비극이다. 구한말 격랑에 휩싸였던 우리 역사는 다 아는 바 대로다. 강대국들 틈에 끼어 이도저도 못한 채 결국 나라를 잃어버린 아픈 역사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지도자들 탓에 넛크래커 사이의 호두가 바스라져버린 셈이다.

우리나라가 정말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 경제도 물론 어렵지만 외교안보 환경에 비할 바가 아니다. 외부로부터 쉴 새 없이 밀어닥치는 파도는 언제라도 대한민국호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이다. 오늘의 작은 결정이 언제 폭풍우가 되어 한반도에 몰려올지 짐작하기 어렵다. 구한말 비슷하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외교 전문가가 아닌 마당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니 해법 자체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한 가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때라는 고언을 하기 위해서다.

먼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여당은 야당을 포함한 외부의 목소리와 전문가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전문가라고 다 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중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해 가장 국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이끌어 가는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같은 진영의 비슷한 의견들만 들어서는 최선의 정책이 나올 수 없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 역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국익이라는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된다. 야당은 문 대통령이 전화 통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요청한 것을 '구걸외교'라고 비난하고 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조만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고 한다. 일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전 들른다는 소식이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G20 회의 후 귀국길에 방한을 요청했다고 한다. 아직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다. 시 주석의 방한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양측의 공식발표까지 기다려봐야 한다. 외교관계가 그렇듯 모든 게 불확실하고 살얼음판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만일 시 주석이나 트럼프 대통령 중 한 사람만 방한하거나 아니면 일이 어그러져 둘 다 방한을 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될까.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전에 이상기류가 있다는 평가와 함께 그 손해는 우리 모두에게 미칠 수밖에 없다.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외교 문제에 있어 야당이 초당적인 협조를 해야 한다는 명분은 그런 데서 찾을 수 있다. 야당의 전폭적인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도 대통령과 집권당의 역량인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주말에 여야가 함께 정동길을 답사해보면 어떨까. 고종의 길을 같이 걸으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함께 협력할 방법은 없는지 모색해보면 좋겠다. 쇼라도 그런 쇼라면 박수를 칠 텐데.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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