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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판사 사회 자존감 회복 시급하다

조상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10 17:58

수정 2019.06.10 17:58

[여의도에서] 판사 사회 자존감 회복 시급하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A씨는 올해 초 기자에게 사표를 낼 거라고 밝혔고, 최근 20년간 정들었던 법원을 떠났다. 그가 평생 판사로 일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혔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법원 안팎에서 그는 가슴이 따뜻한, 사건 당사자에게 꽤나 존경받는 판사로 평가받던 인물이기에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금전적 이유가 본질은 아니라면서 조심스레 최근 '사법농단 의혹' 사건을 거론했다.

이 사건 이전까지도 그는 판사로서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흔한 동창회도 나가지 않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한 다리 건너 법원에 진행 중인 사건을 종종 동창들이 물어보는 일을 겪고나서 부터다.


비록 그는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판사라는 직업에 회의감을 느꼈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법원은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졌고, 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판사들이 사회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사명감과 긍지로 휴정기에도 자진해 출근을 하는 등 강도 높은 업무량을 버텨왔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사태를 겪는 과정에서 상호 존중 문화가 특색인 판사 사회도 분열 양상을 보이고 사법부 불신이 극에 달하면서 자존감이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다.

A씨가 사직의사를 밝힌 무렵 또 다른 부장판사 B씨는 당분간 여행 등 휴식을 갖겠다고 한 뒤 법복을 벗었다. 평소 평생법관제에 대해 소신을 갖고 임하던 A씨와 B씨의 갑작스러운 퇴직 소식은 사법농단 사태와 무관하지 않았다.

A씨는 "잘나가는 변호사처럼 집에 돈을 많이 가져다 주진 못하더라도 사람들의 억울한 부분을 밝혀주고 죄지은 사람에 대해선 온당한 죗값을 받게 해주는 직업 특성을 가족들이 이해해주면서 자랑스러운 남편이자 아빠, 가장으로 살아왔는데 (이번 일을 겪고 나면서) 허탈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법원이 분열되고 법관들이 자존감에 상처를 입게 된 것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자초한 면이 크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부가 세 차례나 벌인 자체조사에서 법관에게 불이익을 줬다는 이른바 '블랙리스트 의혹'은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정치권 등에서 반발이 일자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를 약속했다.

'적폐청산' 수사에서 전 정권 일부 인사에 대해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김경수 경남지사가 1심에서 법정구속이 되자 여당에선 해당 판사에 대해 모욕에 가까운 언사를 쏟아내며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이처럼 도 넘은 사법부 공격을 펼칠 때 김 대법원장은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켰다. 김 지사 구속을 계기로 여권에서 법관 탄핵 목소리를 강화할 때도 김 대법원장은 "판결에 대한 비판은 보장돼야 한다"거나 "국회의 권한"이라며 공세의 빌미를 제공했다. "대법원장이 남의 집 불구경하는 것 같다"는 법원 내부의 불만의 목소리는 사법부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라도 절대 간과해선 안된다.

김 대법원장은 남은 임기를 법원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고 판사들의 자존감을 살릴 수 있는 묘책을 내놓는데 집중해야 한다.
판사의 직업적 사명감을 살리는 것은 사법신뢰와도 직결된다. 직업적 자존감이 떨어진 판사는 외부의 압력에 굴복해 여론에 편승한 비겁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분쟁이 생겼을 때 승복할 수 있도록 기능하는 사법부가 무너지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회인 무정부 상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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