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염주영 칼럼] 백색전화와 개인택시

염주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7.22 17:04

수정 2019.07.22 17:04

신기술과 기득권이 충돌할 때 기득권 보호에 안주하면 안돼
백색전화의 교훈 잊지 말아야
[염주영 칼럼] 백색전화와 개인택시
오래 전에 집에 백색전화가 있었다. 번호를 개인이 소유하는 전화였다. 멀리 이사를 가거나 전화가 필요없게 되면 번호를 팔 수 있었다. 반면 팔 수 없는 전화도 있었는데 청색전화로 불렸다. 번호가 전화국 소유여서 이사를 가게 되면 전화국에 번호를 반납해야 했다. 1980년대 초반 얘기다.


당시 국내에는 전화 교환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교환기를 수입해다 썼는데 외화가 부족해 한꺼번에 많은 양을 수입하지 못했다. 소득이 높아지면서 전화를 놓으려는 사람들이 폭증했다. 전화국마다 대기자가 밀려 1~2년 이상 기다리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5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곳도 있었다. 당장 전화가 필요한 사람들은 백색전화를 샀다. 그 수요가 갈수록 늘어나 값이 치솟았다. 백색전화 매매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중개업소들이 곳곳에 생겼다. 한때는 백색전화 한 대 값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전전자 교환기라는 신기술이 개발됐다. 언론은 연일 대서특필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 정보통신기술(ICT)산업 초고속 성장의 시발점이었다. 전화회선 공급능력이 크게 늘어났다. 이제는 전화국에 신청만 하면 하루 만에 새 전화기가 나왔다. 그런데 이 국가적 쾌거가 우리집 재산목록 1호를 허망하게 무너뜨릴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백색전화 값이 1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앉아서 집 한 채를 날렸다. 그러고도 어디에다 항의는커녕 하소연 한번 못했다. 값이 비쌀 때 못 판 것을 수없이 자책하면서도 누구를 탓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요즘 신세대들은 기억에도 없는 해묵은 백색전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개인택시 문제 때문이다. 개인택시 기사들 가운데는 이미 상당한 손해를 본 사람이 적지 않다. 2017년까지만 해도 한 대에 9000만원을 넘었던 서울의 개인택시 면허값이 6000만원 선으로 떨어졌다. 승차공유라는 신기술 때문이다.

공유경제 시대가 열리고 있다. 앞으로는 집이나 사무실, 차, 기계 등은 물론 심지어 공장까지도 개인이 소유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다. 소유 없이도 소유한 것처럼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공유경제는 4차 산업혁명이 낳은 신기술 복합체다. 승차공유도 그중 하나다. 이동수단의 공급능력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신기술이다. 한 사람이 타던 차를 세 사람이 내 차처럼 불편 없이 탈 수 있으면 공급능력은 세 배가 된다.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 개인택시 사태는 한 세대 전에 내가 겪었던 백색전화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신기술 도입→공급능력 확대→구제품·서비스 가격 폭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닮은꼴이다. 개인택시 기사들이 앞으로 입을 더 큰 경제적 손실과 생계의 막막함을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정부가 개인택시 구제대책을 만들었다. 승차공유 업체가 차량을 한 대 도입할 때마다 고액의 기여금을 물리고, 공급총량도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이다.

백색전화 사태의 피해당사자 중 한 사람으로서 개인택시 기사들이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한다. 정부가 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러나 그 해법을 신기술 도입을 막는 데서 찾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다. 그 옛날 백색전화 가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전전자 교환기 도입을 막았다면 어찌 됐을까. 오늘날 한국의 ICT산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기술에 족쇄를 채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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