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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정부가 할 일

김경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7.22 17:23

수정 2019.07.22 17:23

[여의도에서] 정부가 할 일
"중소기업도 불화수소를 만들 수 있는데 대기업이 안 사준다."

지난 18일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이런 말을 했다는 뉴스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진짜 반도체 산업을 몰라서 하는 말인지, 듣기 좋은 정치적 언어를 구사한 것인지 헷갈렸다.

의도가 무엇이든, 장관이 할 말은 아니다. 전자는 장관의 문제인식을 드러내는 실력의 문제이고, 후자는 장관 자리에서 여전히 '정치인 박영선'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반도체 생산공정마다 필요한 불화수소의 크기나 분자구조 등 제품이 다 다르다.
아직 국내에서는 세부적으로 못 들어가고 있다"고 반박했다.

문재인정부 들어 기업의 사회적가치를 제1의 기업가치로 내세우고 있는 최 회장이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싶다.

최 회장의 말은 "안 쓰는 게 아니라 함부로 못 쓴다"는 얘기다. 지난해 3월 경기 평택에서 발생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30분 정전사고는 500억원대 손실을 냈다. 안정적 수익이 지속되고 있는 기업에 "왜 일본의 수출규제를 예상하지 못했나. 진작에 중소기업과 상생하지"라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양국의 관계는 온전히 정부 책임이다.

박 장관은 또 자신의 페이스북에 '20년 전부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줬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떠했을까?'라는 글을 남겼다.

대기업은 과연 중소기업을 끌어주지 않고 있을까.

시대는 변했다. 정부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대기업의 상생법은 진화했다. 요즘 대기업들은 1차 협력사는 물론 2, 3차 협력사까지 지원을 늘리고 있다.

보여주기 식이라고? 아니다. 무조건 퍼주는 것은 상생이 아니다. 일회성 지원이 아닌 지속 가능한 자생력을 길러주는 것이 진짜 상생이라는 인식이 재계에서부터 퍼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약 900억원에 달하는 성과금을 협력사에도 지급했다. 외부에 드러나진 않지만 중소기업 연구개발(R&D) 단계의 가장 큰 고민인 테스트베드도 상생 차원에서 제공하고 있다. 정부가 손 놓은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마저도 대기업의 사회공헌 사업이 메우고 있는 실정이다.

서로 도움 되는 파트너가 되자는 것이다. 상생은 더 이상 사회공헌이 아닌 투자 영역으로 봐야 한다는 게 재계의 변화된 시각이다. 하지만 박 장관의 발언처럼 정부의 시각은 아직도 대기업을 쳐야 중소기업이 산다는 촌스러운 이분법에 머물러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상생의 길을 찾고 있는 동안 역대 정부들은 R&D 예산을 대폭 깎았다. 그런 정부가 이제 와서 기업에 상생의 책임을 물을 염치가 있을까.

지금은 내부에 총을 겨눌 때가 아니다. 힘의 논리를 앞세워 국제 경제질서를 교란시키는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머리를 맞댈 때다. 외란이 먼저다. 당과 개인적 정치는 나중 일이다.

이 와중에 정부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위한 R&D비용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를 검토한다는 소식은 반갑다. 오랜만에 정부가 길을 잘 찾았다. 정부가 할 일은 제도와 인프라 지원이다.


'기업이 상생하지 않았다'는 말은 정부의 언어가 아니다. 기업이 상생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정부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

km@fnnews.com 김경민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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