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순민 칼럼] ‘탕평채’ 내각은 어떤가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7.24 17:12

수정 2019.07.24 17:48

반대파도 끌어안은 정조
라이벌에 중책 맡긴 링컨
내달 개각 탕평인사 기대

[정순민 칼럼] ‘탕평채’ 내각은 어떤가
탕평은 탕탕평평(蕩蕩平平)의 준말이다. 사서오경의 하나인 '서경(書經)' 홍범편에 나온다. 주나라 무왕이 당대의 현자 기자(箕子)를 찾아가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도를 묻는다. 그러자 기자는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이라고 답한다. "치우침이 없으면 나라의 정치가 큰 바다처럼 잔물결 없이 평온하고 고르다"는 뜻이다. 불편부당함이 왕의 길, 즉 왕도라는 얘기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자신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불렀다. 당쟁의 폐단을 탕평책으로 해소하고자 했던 할아버지 영조의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뜻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또 뛰어난 독서가였던 그는 자신이 소장한 책에 찍는 장서인(藏書印)으로 '탕탕평평 평평탕탕' 여덟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정조의 탕평 인사 중 압권은 반대파인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를 중용한 것이다. 심환지는 사사건건 임금과 부딪혔지만 정조는 그를 내치지 않았다.

탕평의 가장 극적인 사례는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링컨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뒤 경선의 맞상대였던 윌리엄 슈어드와 새먼 체이스, 에드워드 베이츠를 각각 국무장관과 재무장관,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또 자신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고 경멸했던 야당 중진 에드윈 스탠튼을 지금의 국방장관인 전쟁장관에 앉혔다. 측근들이 이들의 임명을 반대하자 링컨은 이렇게 말한다. "내각에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이 나라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뺏을 권리가 내겐 없다." 도리스 굿윈이 쓴 링컨 일대기의 제목이 '팀 오브 라이벌(Team of Rivals)'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지난해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여야 5당 원내대표와 만나는 자리에 탕평채(蕩平菜)를 내놨다. 이를 두고 당시 청와대는 "치우침이 없는 조화와 화합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탕평채는 청포묵에 고기볶음과 데친 미나리, 구운 김 등을 섞어 만든 음식이다. 옛 문헌에 따르면 붕당정치를 혁파하고자 했던 영조가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에 처음 내놨던 음식이라고 한다. 이보다 앞선 지난해 8월에는 다섯가지 색깔이 담긴 비빔밥을 여야 5당 대표에게 대접했다. 메뉴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을 쓴 청와대의 세심함이 돋보이지만 음식에 담긴 뜻이 현실정치에서도 구현됐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최종구 금융위원장에 이어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도 사의를 표명했다. 정치권에는 청와대가 7~9개 부처 장관을 바꾸는 중폭 이상의 개각을 곧 단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일본 경제보복이라는 돌출변수 때문에 시기가 다소 늦춰지고 있긴 하지만 물밑에서는 부산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벌써 몇몇 사람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오르내리며 하마평이 무성하다. 한데 바람결에 실려오는 풍문을 종합해보면 이번에도 탕탕평평은 허탕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돌려막기, 회전문, 코드 인사 같은 구태의 재탕, 삼탕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아서다.

가톨릭 교단에서는 성인을 추대할 때 '데블스 에드버킷(Devil's Advocate)', 즉 악마의 대변인을 둔다.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선의의 비판자 역할을 수행하는 데블스 에드버킷은 집단적 사고의 오류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다. 모두가 찬성할 때 과감하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올바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정조의 심환지나 링컨의 스탠튼처럼 반대자까지도 끌어안는 탕평 인사가 절실한 이유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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