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구두쇠 정부가 옳은가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0.21 17:49

수정 2019.10.21 17:49

재정을 더 풀어야 할 이유
첫째 디플레에 선제대응
둘째는 사회안전망 확충
[곽인찬 칼럼]구두쇠 정부가 옳은가
기와 한 장 아끼려다 대들보 썩힌다는 속담이 있다. 너무 짜게 굴다 되레 더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재정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나라 곳간을 관리하는 기획재정부는 짠돌이 정신으로 충만하다. 사실 그래야 한다. 그 덕에 한국 재정은 탄탄하기로 소문이 났다.
연례 다보스포럼을 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얼마 전 국가경쟁력 순위를 발표했다. 한국은 141개국 중 13위에 올랐다. 분야별로는 거시경제 안정성이 2년 연속 1위에 오른 게 눈에 확 띈다. 그만큼 나랏빚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달리 말하면 구두쇠란 뜻이기도 하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시키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렇게 말 잘 듣는 기재부도 재정을 더 풀라는 권고는 흘려듣는다. 오죽하면 며칠 전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가 한국을 콕 집어 "이제는 재정 화력을 동원할 예산 여력이 있는 국가들을 위한 시간"이라고 했겠는가.

정부가 재정을 더 풀어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디플레이션 선제대응이다. 정부와 한은은 D의 공포를 부인한다. 하지만 민간에선 진작부터 우려의 소리가 나왔다. 이제민 국가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지난 7월 한 정책토론회에서 "일본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더 늦기 전에 충분한 규모의 재정 확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디플레 탓이 크다. 우리도 조짐이 보인다. 소비자물가는 8~9월 두 달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바싹 정신을 차려야 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지난 9월 한국에 온 폴 크루그먼 교수(뉴욕시립대)는 "디플레이션 위험이 있을 때 신중한 기조는 위험을 더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안전망 확충이다. 이는 빈부격차 축소와 직결된다. 실업급여 같은 사회복지는 정부 재정으로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재부는 국가채무 비율 40%를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513조원 규모의 새해 예산은 전년비 9.3% 늘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020년 39.8%로 예상된다. 어떻게든 40% 아래로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돈을 아껴 쓰는 게 틀렸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써야 할 땐 써야 한다.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 경제의 선순환을 위해서다. 한국 경제는 동맥경화증을 앓고 있다. 택시를 보라. 혁신이 뚫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대기업 노조는 기득권을 움켜쥔 채 꼼짝도 안 한다. 왜 그럴까. 한국에선 일자리를 잃는 순간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다. 노동개혁이 안 되는 이유도 고용안전망이 허술한 탓이 크다.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 빈곤층으로 굴러떨어질 게 뻔한데 어떤 노동자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이겠는가. 문 대통령은 복지비 지출을 선투자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동감한다.

문재인정부는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받을 만큼 그 나름 복지에 돈을 썼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복지비 지출은 스웨덴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는커녕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도 못 미친다. 조세부담률, 거기에 사회보험을 더한 국민부담률이 다 최하위 수준이다.

다만 정부는 돈을 헤프게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남미식, 베네수엘라 식으로 쓰면 안 된다. 북유럽 복지시스템이 굴러가는 것은 내 돈이 새지 않는다는 믿음, 낸 만큼 혜택이 돌아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생겨야 세금을 좀 더 내고 국가채무 비율이 40%를 넘어서도 저항이 덜하다.

곽인찬 논설실장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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