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순민 칼럼]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0.30 17:08

수정 2019.10.30 17:55

포노 사피엔스의 시대
SNS 피로증후군 심각
디지털 단식이 해결책
[정순민 칼럼]
"또 다른 세상과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지금보다 스무살은 더 젊은 30대 중반의 한석규가 대나무 숲을 걷다가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이렇게 말한다. 지난 1998년 SK텔레콤이 제작·방영한 스피드 011 CF '산사' 편이다. '휴대폰을 잠시 꺼놓아도 좋다'는 역발상으로 011이 어디서든 잘 터진다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심은 이 광고로 SK텔레콤은 단숨에 국내 이동통신 시장을 평정했다.

뜬금없이 20여년 전 광고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잠시도 꺼지지 않는' 손안의 기기, 스마트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것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 2015년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스마트폰 소지자의 80%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15분 이내에 문자와 뉴스를 확인한다"며 "이것이 없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노모포비아(Nomophobia, 노+모바일폰+포비아의 준말)'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은 통신과 소통이라는 본연의 기능은 물론 책을 읽을 수 있게 하고 택시를 잡게 해주는 등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세상 이치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게 마련이다. 스마트폰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고, 정보전달이 빨라져 정보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됐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노모포비아'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마트폰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거기에 매몰돼 일상을 그르치는 사례가 늘고 있어서다. 'SNS 피로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소셜미디어 과몰입과 악플 같은 문제도 그런 것 중 하나다.

지난 14일 놀라운 소식이 연이어 인터넷을 뒤덮었다. 법무부 장관직 사임을 전격 발표한 조국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여성 아이돌 스타 설리다. 시간 순서상으론 조국이 먼저다. 조국 사퇴 관련 긴급뉴스가 스마트폰 알림음과 함께 전해지더니 곧 설리의 자살 소식이 타전됐다. 한날 연이어 터진 이 두 사건에서 SNS 시대의 비극을 목격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조국 전 장관이 '조적조(조국의 적은 과거의 조국)'라는 비난을 자초한 수만개의 글을 SNS에 올리며 정의로운 척하지 않았다면, 악성 댓글과 조롱으로 어린 여성 아이돌 스타를 죽음으로 내몬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이 없었다면 사정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에릭 슈미트 구글 전 회장은 "인생은 반짝이는 모니터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인생이란 SNS의 '상태' 창을 업데이트하는 일도 아니며, '친구'로 등록된 이들의 숫자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루에 적어도 한 시간씩 스마트폰을 끄고 '디지털 단식'을 감행하라"고 충고했다. 지난 2012년 보스턴대 졸업식에서 에릭 슈미트가 한 이 연설은 세계 최대 IT기업 최고경영자(CEO)의 말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공자는 제자 자공이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묻자 "자장은 지나친 면이 있고, 자하는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다"고 했다.
"그럼, 자장이 더 낫겠군요"라고 되묻자 공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만 못하다"고 답했다. 예부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금과옥조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유는 아마도 인간이 그걸 지키지 못하고 늘 과잉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에릭 슈미트의 말대로 스마트폰을 잠시 꺼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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