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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칼럼]강자의 양보 없이 평화는 없다

강중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1.10 16:50

수정 2019.11.10 16:50

[차관칼럼]강자의 양보 없이 평화는 없다
"정치의 꽃은 복지이고, 외교의 꽃은 평화다!" 오랜 정치학자로서, 현재 외교관으로서 지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경구인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정치 없는 인간은 동물 세계의 약육강식에 지배된다는 뜻이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빼앗는 것이 자연법칙인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것은 정치이고, 그 정치를 통해 약자를 보살피는 데 있다. 복지란 강자 독점의 원칙을 역행하므로 정치의 꽃이다.

그리고 외교의 꽃은 평화다.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언급이 전적으로 틀리지는 않지만, 전쟁 없이 외교로 달성하는 평화가 최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베게티우스의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경구도 일리는 있지만, 평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적대감을 부추기고 외부위협을 과장해 권력을 채우려는 자들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치명적 함정이 있다.

무수한 역사가 증명하듯 총구에서 나오는 권력은 독재로 흐르고, 그 독재자들에 의해 전쟁으로 치달았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평화를 외치면 이적행위이고, 안보 절대주의와 군비 확장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애국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일 뿐이다. 평화야말로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다. 그래서 평화학자 디터 젱하스의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는 말이 더 옳다.

북한(핵) 문제도 마찬가지다. 2017년의 전쟁위기가 준 소중한 교훈은 체제경쟁에서 아무리 북한을 멀찌감치 추월한다 해도 무력을 통한 평화는 한계가 있고, 전쟁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화를 통한 비핵화가 비핵화를 통한 평화에 앞서거나, 적어도 같이 가야 한다. 외교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되므로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는 역지사지 없이 좋은 외교는 불가능하다.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의 핵심개념 중 하나로 안보딜레마가 있다. 국제정치는 국가 같은 중앙권위가 없는 무정부 상태이며, 신뢰가 부재하기 때문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중략)…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는다'는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이 땅에서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다.

안보딜레마 상황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총을 든 두 사람이 서로 겨눈 채 대치하며, 둘 다 죽을 수 있으므로 총을 동시에 내려놓자고 하지만 신뢰가 없기에 종종 누군가 당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총을 내려놓아야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신뢰가 생겨야 총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주장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은 약간 다른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강대국 간에는 미소의 핵감축 협상처럼 드물게 동시에 총을 내려놓아 딜레마를 벗어날 때가 있다. 그러나 강대국과 마주한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는 선택 실패의 대가는 곧 멸망이므로 동시에 놓기보다 신뢰를 확인하고서야 놓으려 한다. 북·미 협상의 힘겨루기가 이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즉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신뢰가 생겨 보상할 수 있다고 하고, 북한은 미국이 신뢰를 보여야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맞선다.

북한도 비핵화프로세스에서 리비아식 '선핵폐기·후보상'은 반대하지만, 구조적으로 자신들의 비핵화 조치가 미국의 안전보장조치보다 선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처럼 제재를 강화하고, 전략자산을 전개하는 상황에서 먼저 비핵화를 할 수는 없다고 항변한다. 미국의 부분적 양보를 통한 신뢰의 보증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 역지사지의 협상은 필수지만 이는 강자에게 더욱 요구되며, 강자의 양보가 없는 문제해결, 즉 지속가능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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