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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들끓는 중남미.. 냄비 시위 '카세롤라소' 펼치는 시민들

박지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1.29 16:06

수정 2019.11.29 16:16

People take part in a 'Cacerolazo' protest, where they bang pots and pans, from their apartments in La Paz, Bolivia October 26, 2019. REUTERS/David Mercado /REUTERS/뉴스1 /사진=
People take part in a 'Cacerolazo' protest, where they bang pots and pans, from their apartments in La Paz, Bolivia October 26, 2019. REUTERS/David Mercado /REUTERS/뉴스1 /사진=
[파이낸셜뉴스] "정의는 두 개의 냄비를 가지고 있지. 하나는 소녀를 위한 것, 또 하나는 다른 소녀를 위한 것. 소녀가 그것을 샀지. 그건 단지 두들기기 위해서야. 소녀는 작은 새에게 그것을 건넸어. 조국과 자유의 작은 새에게." (킬라파윤의 노래 '냄비')
요새 남미는 냄비 소리로 시끄럽다. 권력자를 향한 시민들의 저항의 목소리가 냄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칠레,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국경을 넘어 이제 콜롬비아로 퍼졌다. 왜 이들은 빈 냄비를 두들기며 거리로 나서게 됐을까. 정부의 무능함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1964년 브라질에서 주앙 굴라르 대통령 정부의 정책이 식량난을 일으킬 것이라 우려한 중산층 주부들이 냄비와 프라이팬 등을 두드린 것에서 유래된 남미 특유의 냄비 시위 '카세롤라소(Cacerolazo)'는 이후 1971년 칠레로 이어져 여성들이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에 반대하는 '빈 냄비와 팬의 행진' 시위를 하면서 더욱 확산됐다. 이후 1980년대 칠레에서 피노체트 정권의 퇴진 운동과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에콰도르 정권 반대 시위, 2001년 아르헨티나 페르난도 델라 루아 전 대통령 퇴진 시위에도 어김없이 빈 냄비들이 등장하는 등 정권의 폭압에 항거하는 중남미의 사회 참여 운동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 때마다 계속 이어져 왔다.

누에바 칸시온에 큰 영향을 끼친 1960~1970년대 칠레의 민속음악 그룹 킬라파윤(Quilapayun)의 노래 '냄비'는 당시 벌어진 카세롤라소의 시작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소녀들과 여성들이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냄비를 가지고 나와 두들기는 작은 저항이 결국 가장 큰 권력을 무너뜨리는 동력이 됐음을 노래한다. 카세롤라소가 누에바 칸시온 운동의 모토인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를 상기시키는 가장 적절한 도구가 된 셈이다. 혹여 경찰과 정부의 권력이 무서워 거리에 나올 수 없는 이들도 집 창문 베란다 앞에 냄비를 들고 나와 두들기면서 소극적이나마 분노를 발산할 수 있다. 또 금속을 두드릴 때 나는 경음이 거리의 시위자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것 역시 카세롤라소의 저력이다.

Demonstrators play music during a protest as a national strike continues in Bogota, Colombia November 28, 2019. REUTERS/Luisa Gonzalez /REUTERS/뉴스1 /사진=
Demonstrators play music during a protest as a national strike continues in Bogota, Colombia November 28, 2019. REUTERS/Luisa Gonzalez /REUTERS/뉴스1 /사진=
한 동안 잠잠했던 남미에 다시 냄비 두드리는 소리가 높아진 건 올해 들어서다. 칠레는 지하철 요금이 인상되면서 시위가 촉발됐고, 에콰도르는 정부의 유류 보조금 폐지가 원인이 됐다. 이들 나라들은 실업률이 두자릿대에 이르고 한달 월급이 550달러 수준에 불과하는 등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서민의 삶은 팍팍한데 일부 재벌과 정치가들이 한가롭게 피자를 먹는 사진이 등장하고 서민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효과 없는 정책만 나오자 국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볼리비아에서는 지난 2006년 첫 원주민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14년간 집권한 모랄레스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선거 논란이 확산되면서 시위가 촉발됐다. 지난 10일 모랄레스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멕시코로 망명했는데 이후 지지자와 반대자의 시위가 충돌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냄비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한 곳은 콜롬비아 보고타다. 10%대의 높은 실업률, 치솟는 교육비용, 무장한 갱들의 활개에 무고한 시민들이 살해를 당하는 치안 능력 제로의 이반 두케 정부를 향해 콜롬비아 보고타의 시민들은 시위 두번째 날인 지난 22일부터 일주일 째 냄비를 두들기며 "빈 냄비처럼 내 배도 텅 비었다"고 외치고 있다. 특히 지난 25일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최루탄을 맞아 이틀만에 사망한 18세 고교생 딜란 크루스의 소식이 퍼지면서 시위는 더욱 과열되고 있다.

계기는 제각각이지만 중남미 곳곳의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망가진 경제를 살려내라"며 냄비를 두드리고 있다.

중남미 역사학자인 미국 텍사스대학교 콜린 스나이더 교수는 27일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를 통해 "가장 기본적인 요리 도구들에서 시위자들은 일상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스나이더 교수는 "카세롤라소는 단순하기에 파괴력이 높다"며 "하지만 수많은 대통령들이 카세롤라소를 무시하면서 스스로를 위험한 자리로 몰고가고 있다"고 평했다.
분노한 시민들의 텅 빈 냄비를 채울 지도자는 어디에 있을까. 시민들은 여전히 냄비를 두드리며 기다리고 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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