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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갑-을 뒤바뀐 北·美

김병덕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12 17:40

수정 2019.12.12 17:40

[여의도에서] 갑-을 뒤바뀐 北·美

한반도 정세가 다시 화약고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 "김정은은 로켓맨"이라며 북한을 자극하면서 상황은 북·미 대화가 가능할지가 아니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강행할 것인가로 악화됐다. 벌써부터 북한과 미국이 강대 강의 극한대결을 벌였던 2017년 '화염과 분노'의 시기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북·미 관계를 지켜보며 미국의 전략에 아쉬움이 많다. 애초에 꽁꽁 숨어있던 북한이 대화의 무대로 나온 것은 전방위 대북제재로 압박한 결과물이라는 게 미국 측의 시각이었다. 막다른 길로 내몰린 북한이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트럼프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식이다.


이런 시각은 북·미 대화 내내 이어졌다. FFVD(최종적이며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니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니 하는 복잡한 용어를 꺼내며 비핵화가 확인되기 전 북한의 제재 해제는 안된다는 고압적 스탠스에 변함이 없었다. 가까스로 성사시킨 하노이 북·미 회담에서도 북한의 제재 해제요구를 단칼에 잘랐다. 지금도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들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더 강화하고, 국제사회의 동조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문제는 수십년간 미국과 적대관계를 이어온 북한이 이 같은 요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북한은 이미 200만명이 굶어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고난의 행군'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대한 독기를 키웠고, 그 한복판에 있는 사람이 김 위원장이다. 사실상 북한이 먼저 백기를 들어야 제재를 해제해주겠다는 미국의 협상전략은 김 위원장에게 무장해제시키겠다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수십년간 벼랑끝 전술을 펴 온 북한은 이 분야에서는 미국보다 한 단계 위의 고수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경고를 우린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맞받아칠 정도다.

끊임없이 대화를 제의했지만 정작 북한이 관심을 가질 만한 카드도 내놓지 않았다. 가까스로 성사된 스톡홀름 협상에서는 북한이 '영변+α'를 내놓으면 섬유수출 제재를 3년 유예해 주겠다는 급이 맞지 않는 거래를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협상에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져갔다고 했다. 영변을 대가로 5개 항의 제재 해제를 요구했던 북한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 수긍이 갈 정도다.

북한이 갑자기 '적대시정책 철회'를 들고 나온 것은 어쩌면 더 이상 미국에 기대하지 않겠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적대시정책 철회는 말 그대로 경제, 군사, 외교 등 전 분야에서 북한에 가해지고 있는 모든 압박을 없애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한·미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까지도 포함된다. 5개 항의 대북제재 해제와는 차원이 다른 요구다. 미국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를 꺼낸 시점부터 이미 파국을 준비했던 셈이다.

북한이 ICBM 카드로 '새로운 길'을 준비하자 미국은 급기야 북한의 인권을 논의할 예정이던 유엔 안보리 회의 주제를 미사일로 변경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중재를 요청하더니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파견한다고 한다.


미국은 북·미 협상 내내 자신들이 '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루아침에 방위비를 5배 올리라며 고압적으로 대하듯 협상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북한을 동맹국처럼 착각하며 갑질을 하다 지금은 '을'이 될 처지다.

cynical73@fnnews.com 김병덕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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