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테헤란로

[여의도에서] 탄력근로제 향한 '희망고문'

최갑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19 17:38

수정 2019.12.19 17:38

[여의도에서] 탄력근로제 향한 '희망고문'
우리 기업들에 올 한 해를 정리하는 단어는 '희망고문'일 듯싶다. 20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가 지난 10일 끝났다. 역시나 민생경제 분야는 '빈손 국회'. 경제계가 올해 내내 울부짖다시피한 근로시간 단축 보완입법 처리는 현 시점에선 '휴지조각'이 됐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세계 2위의 노동국가'라는 오명을 씻고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주52시간 근로시간 단축을 시행했다. 시행 대상인 300인 이상 기업은 단속공포에 시달렸다. 대책 없는 근로시간 단축 시행에 기업들은 아수라장이 됐다.
급한 대로 PC오프제, 야근금지 등을 도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졸속 시행에 대한 비난이 들끓자 정부는 2차례 걸쳐 근로시간 단축 계도기간을 부여하며 급한 불만 껐다. 그마저 계도기간이 올 3월로 더 이상 연장되지 않았다. 4월부터 300인 이상 기업은 언제든지 고용노동부의 단속에 노출됐다. 다만 고용부는 계도기간 이후에도 '적극적 단속'은 지양했다. 단 위반사업장의 근로자가 신고할 경우에는 단속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 9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기업이 '잠재적 불법사업장'의 리스크를 떠안고 있는 셈이다. 다행인지 주52시간 근로시간 단축에 걸렸다는 사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과연 모든 기업이 일사불란하게 준수하는 걸까. 현실은 딴판이다. 대기업을 취재하면서 자주 접하는 상당수 홍보맨들만 봐도 52시간을 종종 넘긴다. 기자의 지인인 대기업 휴대폰 개발담당자는 "올해 주52시간을 지킨 달이 3~4개월인 것 같다"고 했다. 52시간을 맞추려고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의 일과 중 개인시간을 부풀려 제출한다고도 했다. 인사팀의 압박이 상당하다고 한다. 내일 아침 결재를 위해 보고서 잔무를 집으로 가져가는 일도 잦다. 우스갯소리로 "이런 실체를 알려달라"고 푸념도 한다.

근로시간 단축 위반은 회사 대표가 처벌받는 중대 행위다. 자칫 일이 몰리는 시기에 52시간을 한 번이라도 위반하면 대표이사가 사법처리를 받고 물러날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러니 근로시간 단축은 형해화 위기다. 그렇다고 기업들이 '배째라식'으로 법을 도외시하겠다는 건 아니다. 최소한 기업이 경영에 차질이 없을 만큼의 숨통은 터달라는 것이다. 지난달 6일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5단체는 공동으로 근로시간 단축 보완, 데이터 3법, 화학물질 규제완화를 20대 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해달라고 호소했다. 가장 시급한 근로시간 단축 보완입법인 탄력근로제 확대는 이미 지난 2월 사회적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합의된 사안이다. 이조차 국회는 패스트트랙 정쟁 속에 9개월을 미적거리다 폐기 위기에 몰아넣었다. 사실 탄력근로제는 에어컨, 김치냉장고 등 성수기에 일이 몰리는 제조공장에 맞춤형이다. 근무시간을 통제하기 어려운 게임이나 휴대폰 등 정보기술(IT) 개발자나 특수직은 선택적 근로제 확대가 절실하다. 선택적 근로제는 현재 한 달 기준으로 주당 평균 52시간 근로를 맞추면 된다. 이 평가기간을 최소한 3개월 이상으로 늘려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조차 눈감은 정치판에는 어불성설이다. 노동계는 기업 사정은 외면한 채 탄력근로제 확대는 결사저지 태세다.
국회나 노동계가 일종의 도그마에 빠진 것 아닌가 싶다. 정기국회 종료일, 경제단체 고위 인사의 말이 귓등을 맴돈다.
"그래도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희망은 꺾고 싶지 않다"고. 희망고문이다.

cgapc@fnnews.com 최갑천 산업부 차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