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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국민을 뒤처지게 해서는 안된다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24 16:48

수정 2019.12.24 16:48

[여의나루]국민을 뒤처지게 해서는 안된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하원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안을 의결했다.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됐지만 미국 정치권은 의외로(?) 조용하다. 미국의 탄핵절차가 우리와 다른 게 첫번째 이유일 것이다.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돼도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지 않고, 상원의 심판을 거쳐야 한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점도 정치권에 소동이 일지 않는 이유다. 하원 다수당인 민주당이 탄핵안에 찬성할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53대 45로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우세한 상원은 탄핵심판을 부결시킬 게 명약관화하다.
미국 정치 역시 이처럼 당파적 고려가 우선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찰자 입장에서는 좀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현직 대통령의 잘못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와 절차가 완비돼 있고, 정치권과 국민 모두가 이를 존중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결과를 뻔히 알지만 일종의 의식(儀式, ritual) 또는 통과의례를 함께 치른다는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원조 대가로 대선 라이벌 조지프 바이든 전 부통령을 조사하도록 압박한 혐의를 받는다. 뇌물죄 및 권한남용 등 중범죄 가능성이 다분하다. 민주당이 자칫 역풍을 맞을 수 있는 현직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인 명분이 거기에 있다. '헌법질서 수호'가 그것이다.

9일간의 청문회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하버드대 노아 펠드먼 등 민주당 측 증인 3인과 공화당 측 조지워싱턴대 조너선 털리 등 법학교수들의 치열한 논리 대결이 볼만했다. 그중 털리 교수의 증언은 경청할 가치가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면서도 그는 정밀한 헌법 역사와 이론 등과 함께 탄핵 반대 이유를 밝혔다. "국민이 대통령에 대한 탄핵절차를 이해하고 함께 가도록 해야 한다" "증거가 확실치 않은데도 하원이 서둘러 탄핵절차를 진행하면 국민은 한참 뒤처져 있게 된다". 치열한 논쟁과 신경전은 있었지만 야유, 고성, 막말은 물론 몸싸움도 없었다. 상대를 존중하며 다른 의견을 경청하는 모습은 정치적 과정도 일종의 예술적 퍼포먼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국회 역시 제도와 절차는 미국 못지않게 완비돼 있다. 국회선진화법은 더욱 정밀한 절차를 규정해 놓았다. 패스트트랙, 예산안 자동부의, 회의방해 금지, 무제한 토론 등을 통해 몸싸움을 방지하고 토론을 장려하면서 의안은 결국 처리될 수 있도록 정밀한 장치를 만든 것이다. 문제는 정해진 제도와 절차를 존중하지 않는 데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선거법 논의가 그렇다. 할 말이 많지만 본회의 상정 절차만 보아도 정말 목불인견이다. 처벌규정 때문에 단상을 점거하지 못할 뿐 과거와 똑같은 야유, 막말, 고성이 재연됐다. 처음부터 관행을 따라 30일 임시국회를 소집하고 무제한 찬반토론을 실시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민들은 개정 선거법, 공수처법이 무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밀실논의만 지켜볼 뿐이었다. 법의 내용도 정확히 모르면서 지지 진영에 따른 찬반의견만 난무한다. 한마디로 국민은 뒤처진 가운데 정치권의 당파적 이익만 앞세우는 모습이다. 선거법 무제한 토론을 해도 말 그대로 무한정 토론은 불가능하다. 3일짜리 쪼개기 임시국회, 누더기 선거법 등 온갖 꼼수를 쓰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제도를 따랐어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정기국회 후 임시국회에서 무제한 토론을 시작했다면 진작 평화로운 성탄절을 맞았을 것이다.
진행 중인 토론을 지켜보면서도 내년에는 평온한 정치권이 가능할지 의구심이 든다. 털리 교수의 증언을 되새기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정치가 국민을 뒤처지게 해서는 안된다."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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