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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서 만든 건면, 공장선 원하던 식감 안나와..밀가루 10톤 쓰며 석달간 실험 계속했죠"[내일을 밝히는 사람들]

라면 연구원
업계 1위 농심라면개발실
봉지면·용기면·수프 등 연구 세분화
동시에 개발중인 제품만 10가지
면 만드는 건 일종의 실험
재료·배합·가공법 따라 맛 달라져
콘셉트와 딱맞는 '처방' 찾아야
제품화돼 잘 팔릴 때 가장 뿌듯
라면이 요리처럼 느껴질 때까지
안주하지 않고 매일 연구할 것

"연구실서 만든 건면, 공장선 원하던 식감 안나와..밀가루 10톤 쓰며 석달간 실험 계속했죠"[내일을 밝히는 사람들]
농심 김도형 면개발팀 과장(왼쪽)과 마유현 수프개발팀 과장은 라면 신제품 개발을 위해 하루에 많게는 다섯번까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 농심 제공
한국에서 라면이 처음 생산된 건 1963년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를 조금 넘긴 때로, 저렴한 가격에 끼니를 해결할 수 있어 인기를 끌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넘는 시간이 흘러 2019년 1인당 국민소득은 3만3000달러를 넘겼다. '가난' '고생' 같은 단어를 연상케 했던 라면 역시 몰라보게 달라졌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기생충'에서 부유층 가족이 소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짜파구리'를 먹는 장면은 라면의 달라진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야흐로 한끼를 때우는 라면의 시대가 지고 즐기는 라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라면업계에선 다품종 소량생산 흐름이 두드러졌다. 몇 가지 대표제품에 역량을 집중해온 과거의 방식 대신, 다양한 제품을 출시해 소비자 취향을 저격하는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2017년부터 3년간 출시된 신제품은 농심·삼양·오뚜기·팔도 4개 회사 것만 110가지가 넘는다. 여기에 군소업체들과 유통매장 PB상품을 더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제품이 시장에 쏟아졌다.

다양한 제품이 나오다보니 연구진의 역할도 중요해졌다. 라면업체 1위에 빛나는 농심 라면개발실에선 30여명의 연구원이 제품개발과 품질유지에 총력을 기울인다. 연구원들은 봉지면과 용기면, 면과 수프개발로 전문분야가 나뉘는데 김도형 면개발팀 과장은 용기면에 들어가는 면 개발을 맡고 있다.

김 과장의 하루는 이렇다. 출근 후엔 함께 연구를 진행하는 동료는 물론, 수프개발팀, 마케팅팀 등 직원들과 다양한 회의를 갖는다. 어제의 연구결과를 평가하고 내일의 연구에 반영할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이다. 회의가 끝나면 실험실로 이동해 더 나은 면을 위한 실험에 돌입한다. 업무 사이사이 라면을 맛보고 평가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한 번에 두세 가지 라면을 블라인드테스트 형식으로 맛보는데, 많을 땐 하루 다섯 번까지도 테스트를 한다고 했다. 개중에 아직 판매가 되지 않은 '개발 중 제품'이 절반을 넘는다니, 동시에 개발 중인 제품만 10가지는 되는 셈이다.

김 과장은 "면을 만드는 행위는 일종의 실험"이라며 "약국에 갈 때 가져가는 처방처럼 처방이라고 부르는데, 구성을 조금씩 바꿔가며 콘셉트와 가장 어울리는 처방을 찾아가는 일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재료와 배합, 익힌다든지 튀긴다든지 하는 방법 같은 것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니까 열 번이든 백번이든 실험을 거듭하면서 콘셉트와 가장 맞는 결과를 찾아간다"고 덧붙였다.

"연구실서 만든 건면, 공장선 원하던 식감 안나와..밀가루 10톤 쓰며 석달간 실험 계속했죠"[내일을 밝히는 사람들]
■연구실 맛 안 나와 3개월 공장서 살기도

김 과장은 지난 한 해 5000만 봉 넘게 팔린 '신라면 건면' 개발에도 참여했다. 그는 "연구소에서 만든 제품에 회장님도 만족하셨는데 현장에 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며 "현장실험이라고 우리가 연구소에서 만든 걸 공장에서 실제로 만들어보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때 원하는 만큼 식감이 안 나와서 석달 정도는 공장에서 살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현장실험만 20번 넘게 했는데 쓴 밀가루 양으로 보면 10t이 넘는다"며 "아무래도 신라면 브랜드다 보니 공급해야 하는 물량이 엄청나다"면서 "라인 속성이 다 다른 상황에서 품질을 똑같이 맞춘다는 게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이 노력을 기울인 제품이 모두 시장에 안착하는 건 아니다. 제품화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고, 시중에 풀려도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제품이 부지기수다. 지난해 여름 나온 하절기 3종도 그런 경우다. 그중 냉라면은 찬물에 수프를 풀어 국물을 만들고 면을 따로 끓여 함께 먹는 방식으로, 기존에는 없는 제품이었으나 큰 인기를 끌진 못했다.

마유현 수프개발팀 과장은 "SNS에 돌아다니던 레시피가 인기를 끌어 기획했는데, 찬물에 분말을 풀어 국물을 만든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며 "유행하는 걸 보고 빠르게 냈는데 판매로 이어지지 않으니까, 소비자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더라"라고 아쉬워했다.

이에 대해 옆에 있던 김 과장은 "사실 개발 초반에는 우리도 먹기 힘들어서 험난한 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도 "결국 어느 정도 수준에 왔다고 판단해서 낸 건데, 끓이지 않고도 제 맛이 나야 한다는 게 새로운 기술이고 시도 아닌가"하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연구원으로서 가장 뿌듯한 경우는 언제일까. 연구원들은 직접 개발한 제품이 상품으로 만들어져 팔려나가는 걸 볼 때라고 입을 모은다. 마 과장은 "내 아이가 나가서 팔리는 걸 보면 뭔가 하나는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내가 참여한 것 중엔 쌀국수랑 해물안성탕면, 부대찌개, 최근엔 양념치킨이 그렇게 제품화됐는데 무척 뿌듯했다"고 설명했다.

뿌듯할 때가 있는 만큼 아쉬울 때도 있다. 마 과장은 "공들인 제품이 드롭(개발 중 여러 사유로 개발이 중단되는 일)되거나 하면 실망감이 큰 게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시드라고 해서 아이디어 뱅크처럼 (개발해 놓은 레시피를) 가지고 있다가 다시 끄집어내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아이템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현재 농심이 보유한 제품화되지 않은 시드는 200여개에 이른다.

김 과장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김 과장은 "그냥 드롭되는 것도 속상한데 기획자 입장에선 나름 공들여서 만든 제품을 위에 경영진이 먹어보니 별로라는 이유로 바꾸라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다"며 "요즘엔 분위기가 나아져서 연구진의 의견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엔 그런 경우가 많았었다"고 설명했다.

■라면이 요리로 느껴질 때까지 연구매진

농심은 지난 수년간 제품군을 끊임없이 확장해왔다. 식재료 본연의 풍미를 살리는 건조공법 'Z-cvd', 파스타 제조기술을 응용한 '네스팅(Nesting)' 등 첨단기술을 활용해 둥지냉면·후루룩국수·후루룩칼국수를 선보였다. 기름에 튀기지 않은 건면과 쌀을 재료로 한 쌀면, 요리의 맛을 담아낸 보글보글부대찌개면·집밥감성 고추장찌개면도 기존 제품과는 궤를 달리하는 제품군이다.

매력적인 제품은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시장에 안착한다. 신라면 블랙·짜왕 등이 대표적 사례다. 기존 제품 평균가보다 50% 이상 높은 가격에도 소비자들은 기꺼이 주머니를 열고 있다. 더 이상 라면이 싸서 찾는 음식은 아니라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라면은 어디까지 뻗어나갈까. 연구원들의 말에서 답을 내다볼 수 있다.
김 과장은 "일본 같은 경우엔 반(半)생면이라고 반죽만 해서 칼로 자른 면제품이 유통되고 있다. 유통기한이 딱 2주인데 면만 놓고 보면 이게 면이 갈 수 있는 끝판왕이라고 생각한다"며 "여러 제약이 있겠지만 우리도 여기까지 가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마 과장 역시 "지금의 맛이 미래의 맛은 아니니까 면처럼 수프에서도 공법을 개발해나가야 한다"며 "HMR(가정간편식)에 건더기가 생으로 들어있는 것처럼 라면도 식사나 요리같이 느껴지도록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