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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1.07 16:42

수정 2020.01.07 16:42

[여의나루]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요설과 궤변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상식이 무시당하고 설 자리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왜곡과 편향을 공공연히 자랑하는 사람이 박수를 받습니다. 사실은 신성하다고 하지요. 비단 언론인들에게만 그렇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때 비로소 다른 견해를 존중하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지요. 자신이 편향되어 있더라도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겠지요. 다른 의견이 아니라 단순한 거짓말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컴퓨터를 반출한 것은 검찰이 증거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증거보전 차원에서 그런 것이다." 이런 정도는 웃어넘길 수도 있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말이지만 스스로 편향되었다는 데야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오픈북 시험이니까 어떤 자료든 다 참고할 수 있는 시험이에요." 아들의 온라인 시험에서 부모들이 문제를 풀어준 것을 옹호하는 말입니다.
논리학 이론을 들 것도 없습니다. 오픈북이든 아니든 시험은 학생이 치는 것입니다. 부모든 아니든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린 것은 부정행위이지요. 재판을 지켜보자고 하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나는 편향되었다는 말로 웃고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더 심각한 문제는 왜곡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투의 주장에 열광하는 청중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새해 이런 글을 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 생각하는 청중이 되자고 다짐하기 위함입니다. 올 한 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자는 얘깁니다. 비단 위에 예로 든 경우만이겠습니까. 특정 진영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서 사람들의 생각에 혼란을 일으키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동하는 일은 고금동서를 막론합니다. '얼른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둘러대어 합리화시키려는 허위적인 변론을 일컫는 말.' 이런 말을 하는 궤변론자들이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활약했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이른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 사람들은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진실처럼 보이는 것 또는 진실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를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식민지 이후 국가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보수 권위주의 정권이 오랜 시간 계속됐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전혀 다른 방향의 진보 국가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경제생활뿐 아니라 개인 삶의 모든 영역을 국가가 간섭하려 합니다. 근대성의 기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체득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건전한 개인주의가 발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그러나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영국인의 중산층 기준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이렇듯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개인의 발견을 올 한 해의 과제로 하면 좋겠습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찬 국민으로 이뤄진 나라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상대가 의견은 다르지만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최소한의 믿음이 있어야겠지요. 중요한 건 자신의 생각, 자신의 관점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역량을 기르는 것입니다.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나만의 생각이 가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를 인정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선거를 앞둔 진영 정치의 광풍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일 것입니다. 고 함석헌님이 오래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에서 갈파한 게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네가 되어라. 그래야 우리가 하나가 되리라."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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