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다리 위에 선 이들 돌려세우다[내일을 밝히는 사람들]

오은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1.22 17:19

수정 2020.01.22 17:19

수화기 속 얼굴 없는 히어로들
한강 다리에 설치된 SOS전화   
극단적 선택 앞둔 수백 수천의 사연 쏟아져  
"수능 전후, 모두 들뜬 명절 전후
가장 많이 걸려와요" 
하염없이 울기도, 몇시간 하소연하기도,
다짜고짜 분풀이하기도…  
"수백명 자원 상담사 있기에
오늘도 누군가를 구합니다"
한국생명의전화 직원 및 상담원. 윗줄 왼쪽부터 하상훈 원장, 최장숙 상담원, 우혜진 부장, 박수안 팀장, 김지혜 대리. 아랫줄 왼쪽부터 유소현 사회복지사, 김봉수 팀장, 김요한 과장. 사진=서동일 기자
한국생명의전화 직원 및 상담원. 윗줄 왼쪽부터 하상훈 원장, 최장숙 상담원, 우혜진 부장, 박수안 팀장, 김지혜 대리. 아랫줄 왼쪽부터 유소현 사회복지사, 김봉수 팀장, 김요한 과장. 사진=서동일 기자
"네 생명의 전화입니다. 어떤 힘든 일로 전화주셨나요?"

한 사람이 들어가면 딱 맞을 듯한 2평(6.6㎡) 남짓 작은 방엔 컴퓨터 한 대와 전화기 한 대, 책상 한 개가 전부다. 수화기 너머 슬픈 이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이곳에선 수천, 수백만의 사연이 쏟아진다. 언뜻 보면 여느 콜센터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 곳이지만, 지난 8년 동안 이 좁은 방에선 1500명의 목숨을 구했다. 받은 전화만 7800건을 넘는다. 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생명의 기로에 선 이들뿐만이 아니다.
집에서도, 길을 지나가면서도, 전철을 타다가도 우울한 일은 생각난다. 1588-9191 전화상담은 1976년 개원 이래 총 100만건 넘는 상담전화를 받았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수백명의 전문 상담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상담사들을 위로하는 사람들, 한국생명의전화 직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절 전, 수능성적표 발표날이 가장 바빠요"

지난 20일 서울 오패산로 한국생명의전화 상담실에서 만난 서울센터 소속 박수안 팀장(32)과 유소현 사회복지사(29)는 300명 넘는 상담사들을 관리하고, 상담의 질적 향상을 위해 고민한다. 전화상담도 직접 한다. 이들은 본인들이 하는 일을 '매력적인 일'이라고 소개했다. 박 팀장은 "상대방에 대해 서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허심탄회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은데, 생명의전화라는 특성상 그렇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유씨 역시 "상담해 주시는 자원봉사자분들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순수하게 모든 사람들이 모여 어떻게든 사람 한 명 살린다는 마음으로 일한다는 게 신기하고 인상깊었다"고 전했다.

한강을 한 번이라도 걸어서 건너본 사람이라면, 한강 교량에 설치된 초록색 'SOS 전화'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벼랑 끝에서 한강을 찾는 시민들을 위해 설치된 긴급전화상담 시스템이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과 한국생명의전화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이 전화는 지난 2011년 마포대교를 시작으로 현재는 서울시 19개 한강 교량에 총 74대가 설치돼 있다. 생명의전화는 SOS 전화로 걸려온 모든 전화를 다 연결한다. 외부에 있기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 횟수는 많지는 않다. 그러나 한 콜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직원들은 SOS 전화만 받을 수 있는 전화기를 24시간 가지고 다닌다. 센터 내 전화부스가 모두 통화 중일 경우를 대비해 2대의 전화기가 직원들에게 주어진다.

이 전화기를 가지고 있으면 주말에도, 잠을 자면서도, 대중교통으로 퇴근하면서도 긴장을 놓칠 수 없다. 박 팀장은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와 뛰어내려 조용한 곳을 찾아 받은 적이 있다"며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한 사람을 구조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 "이 전화가 울리면 아직도 심장이 뛴다"고 전했다.

전화상담은 '바쁜 시즌'이 따로 있다. 수능날이나 수능성적표가 나오는 날, 특히 지금처럼 명절을 앞두고는 더 그렇다. 유씨는 "명절 전후로는 어머님 나이대인 중년 여성분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취업준비생들에게 특히 상담전화가 많이 온다"며 "가족 간의 갈등이 다시 반복되는 시기이기도 하고, 그동안 쌓인 갈등이 터지는 시기이기도 한 것 같다"고 했다.

직접 전화상담을 하다 보면 몇 시간을 훌쩍 넘겨버리기도, 에너지를 모두 쏟을 만큼 힘든 상담을 마주하기도 한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의 전화나, 다짜고짜 욕하고 분풀이하는 악성전화는 쉽게 상담사들의 소진으로 이어진다.

박 팀장은 "하염없이 우는 사람과의 통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박 팀장이 "어떻게 많이 힘드냐, 괜찮냐"고 물었지만 수화기에서는 이야기할 힘도 없는 듯 울음소리만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사연을 얘기하는 사람은 그나마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유씨 역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힘들 때가 있다. 유씨는 "사연을 듣다보면 참다참다 이야기할 곳이 없으니까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많다"며 "한 명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만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전했다.

■힘든 사연 나누며 지치지 않게…창구 역할도

막상 힘든 사연이 쏟아지면 베테랑 상담 봉사자들도 힘들어할 때가 있다. 한국생명의전화 직원들은 이런 경우를 놓치지 않는다. 봉사자들이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 항상 직원들은 '오늘 어땠는지, 힘들진 않았는지' 이야기를 시작한다. 봉사자들이 힘듦을 해소할 수 있도록 창구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센터에서는 봉사자끼리 서로 사례를 나누고, 어떻게 하면 상담의 질을 더 높일 수 있을지 연구하는 모임도 한다. 직원들은 이 과정에서 봉사자들이 서로를 지지해주며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게끔 돕는다.

직원들은 일하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조차 상담 봉사자들이 칭찬을 받을 때라고 전했다. 유씨는 "내담자가 '상담선생님이 너무 잘 받아줘서 그분 덕분에 내가 살아있다. 전해달라'는 이야기를 할때, 상담선생님이 '이래서 내가 상담을 나온다'고 하실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일을 하면서 오히려 본인들이 배우는 점이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박 팀장은 "사례 한 줄만 봤을 땐 '이런 사람이 아닐까'하는 편견이 생기기도 하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면 환경이나 배경을 이해하게 되니 나만의 틀이 깨지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유씨도 "상담선생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며 "다양한 의견을 들으며 배우고 성장하는 기분이 든다"고 덧붙였다.

■"저희의 슈퍼히어로가 되어주세요"

물론 힘든 점도 있다. 자원봉사자로 상담이 운영되다 보니 지속적으로 관심이 유지되지 않으면 봉사자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박 팀장은 "상담봉사자분들의 발길이 너무나 소중한데, 최근 3~4년 사이엔 점차 봉사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며 "그때 가장 속상하다"며 아쉬워했다. 한국생명의전화는 상담 봉사자들을 '슈퍼 히어로'라고 부른다.
그만큼 봉사자들의 손길이 소중하다. 유씨는 생명의전화 봉사활동에 대해 "다른 곳에서 절대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라며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 돌아보게 되고, 오히려 깨달음도 얻을 수 있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박 팀장도 "생명의전화를 이루는 분들은 상담 봉사자들"이라며 "상담 분야에 관심 있는 분들은 주저하지 않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onsunn@fnnews.com 오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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