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치유없이 사회통합 없다]

마음의 상처 아물도록 … 국가폭력 피해자 심리치료 돕는다  

(中) 트라우마 치유센터 구축
광주·제주센터, 올부터 지원받아
민주화운동 등 피해자에 치료 제공
치유사업과 별개로 독립기관 형태
‘국립 트라우마 치유센터’ 추진도

39명. 광주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숫자다. 한국 총 인구 대비 자살 비율인 0.02%의 500배가 넘는 수치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자 24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37.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다고 답했다. 19.9%와 15.4%가 우울장애와 불안·공황장애에 시달렸고, 대인공포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대답도 15.4%에 달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까지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 인권침해 사건 등이 발생했지만, 지금까지 국가 차원에서 직접 피해 당사자 및 가족 등의 심리 치유를 도운 적은 없었다. 이들을 추모하고 기억할만한 공간도 여전히 미흡하다.

정부는 올해 처음으로 국가폭력 트라우마센터 치유서비스에 나섰다. 과거 인권탄압의 상징적 공간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도 민주인권기념관(가칭)으로 탈바꿈시켜 한국 근현대사에 드리웠던 어둠을 걷어내고 사회통합의 밑바탕을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정부 치유사업 올해 첫 시행

12일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올해부터 정부가 직접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사업에 나선다. 광주시 광주트라우마센터와 제주도 제주4.3평화재단에 치유사업을 위한 국비를 지원해 트라우마 치유사업을 돕는 형식이다. 이에 따라, 2012년부터 5.18민주화운동 등 피해자들의 심리치유 서비스를 제공해 온 광주센터는 올해부터 행안부 예산을 지원받게 되며, 오는 4월에는 제주센터가 첫 문을 연다.

광주센터는 민주화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차지하는 역사적 중요성, 제주센터는 대표적인 민간인 희생 사건인 4.3사건 발생지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모든 국가폭력의 직접 피해 당사자, 가족, 목격자, 사건관련자 등 지금까지 후유증으로 인해 치유가 필요한 대상에게 상담 등 심리치유는 물론 재활 운동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2012년부터 광주센터에서 일해온 명지원 센터장은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분들은 전쟁을 경험한 것과 다르지 않다. 트라우마는 80년대 그 때 기억속으로 피해자들을 갑자기 데려가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한다"며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 가족관계까지 망가진 분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국립 치유센터 건립도 추진

국가 폭력의 피해자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기나긴 세월동안 받은 고통도 크다. 제주센터 운영을 맡은 제주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은 "특히 제주 4.3은 이념 문제가 결부돼 빨갱이, 폭도라는 비난에 상당한 상처를 받았다. 연좌제로 취직, 사관학교 입학, 해외여행을 다 통제당했다"며 "이중·삼중고를 겪은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은 분들이 많은데 치유센터를 만든다고 하니 다들 좋아하신다"고 전했다.

UN고문방지협약은 고문생존자 치료, 재활에 대한 국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뿐만 아니라 인도, 필리핀, 네팔 등 전 세계 70여개국에 140여개 치유센터가 있다. 한국 정부도 1995년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했지만 그간 심리치유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터라 이제서야 국가 차원의 치유 사업이 첫발을 뗀 것이다.

충북대 심리학과 최현정 교수는 "국가 폭력 피해자 트라우마의 결정적인 회복요인은 사회적 인정인데,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지지가 부재했다"며 "국가가 나서면 피해자들이 기본적인 신뢰를 회복하는데 기초가 된다. 신뢰회복이 치료의 시작이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치유 사업은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치유사업 지원과 별도로 독립기관 형태의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센터' 설립도 추진한다. 행안부 서승우 지방행정정책관은 '장기적으로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센터 설립을 위해 국회에 계류돼 있는 관련 법 통과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작년 8월 천정배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립치유센터 설립 제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상황이다.

■인권탄압 공간, 민주·인권 공간으로 탈바꿈

심리치유와 동시에 근현대사의 기억을 저장하고 후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념공간도 조성된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 부지에 '민주인권기념관(가칭)'이 들어서는 것. 과거 고문 등 인권탄압이 자행되었던 7층 건물은 그대로 유지하되 해당 부지 내에 연면적 6600㎡의 추가적인 시설물이 건립된다. 금년 말 착공을 시작해 오는 2022년 하반기 개관이 목표다.

민주·인권 나아가 평화를 포괄할 수 있는 대표 기념관으로 조성될 전망이다.
기념관 설립 추진을 위한 전문가 회의체에 참여한 고려대 사학과 최호근 교수는 "7층 건물만 보존할 것인지, 추가적인 시설물을 만들어야할지 여부에 대해 많은 토론을 진행했다. 원형 그대로만 보존할 경우 젊은 세대들이 보존돼 있는 건물의 느낌만으로는 당시 상황을 충분하게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란 의견이 더 우세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이어 "지금 세대의 관심사, 필요에 따라 당시 기억이 적절하게 번역돼 젊은 세대가 자기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면 현장을 아무리 보존해도 소용없게 된다"며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 생태민주주의, 학생 권리 등 새로운 세대의 민주주의를 함께 고민하는 장소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