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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혐오의 사슬을 끊어라

이설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3.02 17:41

수정 2020.03.02 17:41

[여의도에서]혐오의 사슬을 끊어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 소식이 대서특필되며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돌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그들(한국)은 무역에서 우리를 때리고 빌어먹을 영화로 아카데미 상을 탔다"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선셋 대로' 같은 미국 영화가 오스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늘 내세우는 '미국 우선주의'로 대선 분위기에 보수층 결집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지난해에는 흑인 중진 의원인 민주당 소속 엘리자 커핑스 하원의원의 지역구인 볼티모어를 "미국에서 가장 최악의 선거구이자 가장 위험한 지역" "역겹고 쥐와 설치류가 들끓는 지저분한 곳"이라고 말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혐오 발언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다.

집권 내내 공개적 방식으로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하고, 혐오를 부추기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계속되면서 오히려 그런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 살아야 하는 미국인들에 대한 동정심까지 들 정도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공연하게 일삼는 혐오의 방식은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마치 당연히 그래도 된다는 듯 곳곳에서 혐오 발언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손흥민 선수와 함께 토트넘 홋스퍼에서 뛰는 잉글랜드 축구 대표선수 델레 알리는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항 라운지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아시아인과 손세정제를 잇따라 보여주며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를 잡으려면 나보다 빨라야 한다"는 자막을 단 영상을 게재했다. 아시아인이 바이러스를 옮긴다는 의도를 담았다. 잉글랜드축구협회(FA)는 "차별적 언행을 하면 안된다는 규정을 위반했다"며 알리에 대한 징계절차에 착수했다.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들의 경험담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백인들로부터 바이러스 전파자로 의심을 받으면서 혹시나 일어날 수도 있는 폭력에도 대비해야 한다.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 최고대표는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우려를 표했다. 지난 2월 27일(현지시간) 제네바 유엔에서 열린 인권이사회에서 바첼레트 최고대표는 "코로나19는 중국과 동아시아 민족에 대한 충격적인 편견의 흐름을 촉발했다"며 "세계는 이런 인종차별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일련의 사태들을 보며 불과 몇 주 전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게 된다.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후 중국인, 조선족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가 이어졌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확진자 수가 증가하자 비슷한 혐오가 내국인들 사이에서도 벌어졌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어떤 경로로 만들어진 것인지 밝혀지지 않은 이상 똑같은 위험에 처한 그들도 피해자일 뿐이다.

인류 역사에서 혐오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됐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혐오는 건강한 담론을 파괴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차단한다.
혐오는 폭력에 의한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내가 하는 혐오는 옳고, 나에 대한 혐오는 틀렸다는 논리가 통할 수는 없다.
중국에 이어 확진자 수가 가장 많은 우리나라에 대한 혐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지금으로선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 개인위생을 강화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한다.

ronia@fnnews.com 이설영 생활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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