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배철현의 월요묵상] 코로나19가 가져온 불행이 우리에게 묻는 것

뉴스1

입력 2020.03.16 06:30

수정 2020.03.16 06:30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뉴스1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1774–1840) '창문 밖을 보는 여인', 1822, 유화, 1833, 44×37㎝, 베를린 구국립미술관.© 뉴스1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1774–1840) '창문 밖을 보는 여인', 1822, 유화, 1833, 44×37㎝, 베를린 구국립미술관.© 뉴스1

(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우리 모두를 한 치도 예상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이 전염병이 어떻게 왜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잘 보이지도 않는 미물과 같은 바이러스의 공격에 쉽게 무너져 버리는 ‘취약한 동물’이다.

코로나19는 인간이 상상한 신의 모습과 유사하다. 스위스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성의 개념'에서 신을 ‘절대타자'(絕代他者)라고 말했다. ‘절대타자’는 그 기원이나 특성을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존재란 뜻이다.


오토는 이 절대타자의 ‘알 수 없음’을 다음 세 가지 용어, 즉 신비(神祕), 전율(戰慄), 그리고 매력(魅力)으로 설명한다. 코로나19는 첫 번째 두 가지 특징을 그대로 지녔다. 하나는 신비다.

‘신비’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단어 ‘미스테리움’(mysterium)은 ‘감추어진 어떤 것’이라 의미다. 우주는 신비다. 왜냐하면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바이러스의 정체는 아직도 모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이란 숙주와 연합해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다른 ‘변종'(變種)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바이러스는 은밀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과학자들과 제약회사들이 치료제를 생산하여 임상실험을 마칠 까지는 수년이 걸릴 수가 있다.

둘째는 전율(戰慄)이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는 이 바이러스를 ‘팬데믹’(pandemic), 즉 ‘세계적 대유행’으로 선언했다. ‘팬데믹’은 바이러스가 이제 인간의 계산인 역학조사를 뛰어넘어 모든(pan-) 사람들(demos)에게 무차별적으로 전파된다는 심각한 경고다.

바이러스가 아니라 그 바이러스를 지닌 인간이 바이러스가 돼,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 전염병은 기하급수적으로 전파될 것이다. G1을 꿈꾸는 중국의 주석 시진핑은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실크로드경계벨트를 구축해 미국의 독주에 맞섰다. 그 일대일로의 종착점이 이탈리아다.

중국의 우한에서 시작한 이 바이러스는 21세기 최첨단 과학, 상업, 특히 명품의 도시인 이탈리아 밀라노를 거점으로 삼았다. 이탈리아인들은 중국인들이 제공하는 집약적이며 효율적인 노동으로 코로나19에 감염된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코로나19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전체를 감염시킬 위세다. 중동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란은 중국에서 시작한 ‘일대일로’의 중간 거점이다. 이란의 낙후된 의료시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전염병을 더욱 창궐하게 만들어 주변 국가들로 퍼져나갈 기세다.

코로나19가 마침에 G1인 미국의 기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리더는 항상 그 나라 수준의 평균이다. 트럼트는 오만(傲慢)하다. 그가 이 전염병에 대한 태도도 오만하고 안이(安易)하다. 그는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라는 자극적인 캐치프레이즈로 미국 대중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이기심을 부추겨 대통령이 됐다.

그는 이 전염병을 ‘외국 바이러스’(foreign virus)라고 규정하며 남을 탓하고, 자신들의 의료시설을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다가 전염병 예방에 필요한 결정적인 시간을 놓쳤다. 그는 며칠 전 뒤늦게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생색내기용 예산을 배정했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특징이 있다. ‘휘브리스’(hybris) 즉 오만이다. 트럼프는 슈퍼파워로 미국이 누리는 혜택을 우연히 자신들에게 허락된 우연한 선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미국 제일주의’와 ‘미국 일방주의’로 무장한 그는 자신이 잘나서 그런 혜택을 누린다고 착각했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눈앞에 온 위험을 감지할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다. 이 ‘아둔’을 그리스어로 ‘아테’(atē)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빛이 하나도 없는 컴컴한 숲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더듬는 어리석음이다. 그 아둔함의 자연스러운 짝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그 결과를 ‘네메시스'(nemēsis)라고 불렀다. 네메시스는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나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와 같이 강력하지만 결국 정복당할 수밖에 없는 적을 묘사하는 단어로 잘못 알려져 있다. 네메시스는 건방지고 무례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당연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무자비한 정의의 복수다. ‘네메시스’는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는 정의다.

미국, 중국, 그리고 유럽연합(EU)과 같은 최강국이 이 시점에 코로나19로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대한민국이 바이러스에 발목을 잡힌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연(偶然)이 없다. 지나고 보면, 그런 사건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必然)이다. 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한 위생수칙 중 ‘마스크 착용’에 그 의미가 숨어있다.

마스크 착용은 공중을 통해 감염되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한 개인 수칙이다. ‘마스크’(mask)라는 단어는 어원이 불명하다. 라틴어 ‘마스카’(masca)는 원래 공연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효과적으로 소화하기 위해, 그 배역에 어울리는 가면을 의미했다. 자신의 원래 모습을 감추고, 그 공연이 요구하는 배역에 맞는 연기를 위해, 마스크는 필수적이었다.

마스크의 구조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가면무도회 마스크는 자신의 달콤한 말로 상대방으로부터 환심을 사고, 자신의 의중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만 가린다. 우리가 착용하는 마스크는 눈이 아니라 코와 입을 가린다. 이 마스크는 3중 혹은 4중 구조의 부직포(不織布)와 그것을 귀에다 거는 이어밴드로 구성돼있다.

마스크는 눈과 귀를 열어 놓았지만, 코와 입은 닫았다. 마스크는 우리에게 ‘침묵'(沈默)을 요구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쓸데없는 말들을 많이 뱉어냈다.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은 '자신을 위한 노래'라는 시 제3단락 처음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말쟁이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처음이 어쩌구 마지막이 저쩌구.

그러나 나는 처음이나 마지막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더 처음은 결코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도 더 늙은 시절도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완벽한 것은 결코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훌륭한 천국도 더 비참한 지옥은 없습니다.”

침묵은 습관적으로 말하는 우리를 제어하는 훈련이다. 침묵은 자신이 우연히 경험해 아는 세계가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안달에 마스크를 씌우는 용기다. 마스크는 정작 말을 해야 할 때는, 심사숙고의 말, 정성스러운 말,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을 하라는 가시적인 장치다.

마스크는 동시에 우리에게 관찰과 경청을 요구한다. 상대방의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말고, 귀를 쫑긋 세워 상대방 말을 경청하라는 명령이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화자찬하는 말을 억제하고, 상대방의 말하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보지 말고, 그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 심중을 파악하고 관찰하라는 명령이다. 입은 하나이고 눈과 귀는 두 개인 이유이기도 하다.


마스크는 침묵의 훈련이며, 경청과 관찰을 위한 장치다. 코로나19와 같은 시기, 질투, 이기심, 분열, 음모, 분노, 그리고 폭력이 우리의 입을 통해 무분별하게 방출돼 온 사회를 전염시키고 있다.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이 불행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나는 침묵할 수 있는가? 나는 해야 할 말만 하는가? 나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가?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가? 나는 타인의 표정을 깊이 관찰하는가? 그를 연민의 눈으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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