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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기부는 자발적일때 아름답다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5.07 17:09

수정 2020.05.07 17:09

[여의도에서] 기부는 자발적일때 아름답다
"못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안 받는 게 속 편하다."

얼마 전 시청의 한 고위 공무원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재난지원금 수령을 놓고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나온 대답이다.

서울시는 중위소득 100% 이하를 기준으로 지급대상을 정했지만, 중앙정부와 경기도 등은 일괄지급하기로 했으니 시 고위 공직자들도 이 돈을 받을 수는 있게 됐다. 고위 공무원이라면 코로나19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 리는 없어 보이는데, 재난지원금을 받는다고 하면 주위의 눈치가 고울 리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재난지원금은 수령자가 받지 않으면 자동 기부된다.

이런 기류는 공직사회 곳곳에서 이미 나오고 있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장이 지원금 기부선언을 하면서 공무원들에게는 '알아서 판단하라'며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는 공직사회뿐 아니다. 정부 입김이 미치는 공기업, 공공 유관기관들에서는 이미 기부동참 릴레이가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겠다면서 뒤이어 자발적 기부를 언급한 뒤부터 이미 예고됐던 촌극이기도 하다. 정부에서는 수차례 기부는 강제성이 없을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그 뒤에는 묘하게도 동참을 유도한다는 뉘앙스가 따라붙어왔다.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기부는 자율, 형편이 되면 동참"이라고 말했으니 이쯤 되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기부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기류는 공공영역을 넘어 이제 민간기업으로도 넘어가고 있다. 어쩌면 10대 그룹 고위 임원진도 앞다퉈 기부행렬 동참을 커밍아웃하고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재난지원금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포퓰리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총선까지 겹쳤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의 여야는 과거에도 이미 수차례 자리를 바꿔가며 상대의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비판해 왔으니 이번 역시 그냥 넘어갈 리 만무하다. 포퓰리즘은 원래 국민의 뜻을 반영한 정치활동을 말하는데, 한편으로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꼼수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포퓰리즘이 진짜 민중의 뜻을 따르는 것이냐, 아니면 꼼수에 불과하냐는 결국 그 정책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느냐를 놓고 판단할 문제다.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원래의 취지를 고수한다면 그것은 민의를 따르는 것일 테지만 시류에 따라 태도를 바꿔가며 대중의 비위를 맞춘다면 그것은 꼼수다.

재난지원금 얘기가 왜 나오게 됐는지 되돌아보자. 코로나19로 움츠러든 가계가 소득이 줄고 돈을 쓰지 않으니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죽어나고 있다는 게 지원금 지급 결정의 시초였다.

지원금이 마중물이 되어 시장에 풀리고, 다시 코로나19 때문에 얼어붙은 경기에도 혈색이 돌게 하자는 취지라는 얘기다. 원래 목적을 살리려면 재난지원금은 기부가 아니라 당당하게 수령해 정해진 기간에 쓰도록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는 것이 인기영합을 노린 포퓰리즘이라고 비판받았듯, 암묵적으로 '자발적 기부'로 몰아가는 지금의 정부와 정치권의 분위기도 역시 면피를 위한 포퓰리즘이다. 자발적 기부를 유도한다는 말은 사실상 모순이다. '자발'은 타인이 유도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기부는 아름답다. 그러나 남의 지갑을 강제로 열게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의 기부가 자발적이었다면 남의 기부도 스스로 선택하게 둬야 한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정책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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