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맞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6.01 18:42

수정 2020.06.01 18:42

유승민 명언, 여전히 유효
국채만 찍어선 감당 못해
혜택 원하면 세금 더 내야
[곽인찬 칼럼] 맞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경점 치고 문지른다는 속담이 있다. 조선시대에 밤을 5경(五更)으로 나눴다. 경은 다시 5점(點)으로 잘개 쪼갰다. 경은 북을 쳐서 알리고, 점은 징을 쳐서 알렸다. 그런데 한 군사가 그만 경점을 잘못 쳤다. 놀란 군사가 뒤늦게 북을 문질렀지만 그런다고 이미 퍼져나간 북소리가 사라질까. 잘못을 덮으려고 허둥대는 초짜 군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복지가 대세다. 진보는 물론 보수도 동의한다. 지난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9년 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밀어붙인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두고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며 "당이 시대정신을 못 읽었다"고 말했다. 오 전 시장은 "나도 무상급식에 대해선 생각이 변했다"며 기꺼이 비판을 수용했다.

자, 이제 방향은 정해졌다. 남은 건 돈이다. 무슨 돈, 누구 돈으로 전 국민 고용보험을 실시하고, 기본소득을 월급처럼 지급할 것이냐다. 쉬운 길이 있다. 국채를 신나게 찍으면 된다. 마침 한국은 선진국 가운데 재정건전성이 양호한 편에 속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한국더러 재정을 더 쓰라고 성화다.

여기서 잠깐, 과연 우리는 IMF의 권고를 어디까지 따라야 할까. 20여년 전 외환위기 때 IMF와 지금의 IMF가 딴판이라서 하는 얘기다. 예전 IMF는 긴축의 투사였다. 우리더러 금리를 올리고 빚을 줄이라고 난리를 쳤다. 우리는 돈줄이 시키는 대로 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자 IMF가 싹 달라졌다. 돌연 부양의 전사가 됐다. 결론은 이렇다. 긴축이든 부양이든 IMF는 한국 경제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결국 선택은 우리 몫이다.

나는 국채 대신 세금을 더 걷자는 데 한 표를 던진다. 재정건전성은 우리가 애써 쌓은 공든탑이다. 위기 때 한국 경제를 구원할 보증수표다. 이 소중한 자산을 함부로 다뤄선 곤란하다. 대안은 증세다. 국책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정규철 경제전망실장은 "중장기적으로 증세가 필요하며, 당장은 어렵겠지만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KIPF)의 김유찬 원장은 "증세를 뒤로 미루지 말고 적절한 규모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오해하지 말자. 두 사람은 재정건전성 교조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 위기에 재정이 적극 대응할 것을 주문한다. 다만 긴 시야에서 증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김 원장은 "일회성 지원금은 부채로, 효용이 지속되는 공공투자와 같은 지출 확대는 증세와 부채로 나누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내 생각도 같다. 이를테면 국가채무 비율은 50%를 마지노선으로 잡으면 어떨까 싶다. 모자라는 돈은 증세로 조달한다.

5년 전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국회 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말했다. 유승민은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 출신이다.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은 "명연설"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맞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손자병법'은 제1편에서 계(計)를 다룬다. 전쟁에 앞서 계획하라는 것이다.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상책으로 친다. 복지는 재정전쟁이다. 어떻게 해야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를 보면 답이 보인다.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더 내면 된다. 이것이 계획이다.
복지는 장차 나라의 흥망을 가를 중대사다. 빈틈없는 사전 계획은 필수다.
경점을 잘못 쳐놓고 뒤늦게 허둥대는 군사 꼴을 보여선 안 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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