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일본인에 새겨진 전쟁의 트라우마 "국가에 내 정보 못줘" 깜깜이 방역 낳았다 [글로벌 리포트]

조은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6.07 17:28

수정 2020.06.08 16:31

일본 '아날로그 행정'에 머물러 있는 이유 
도쿄 코로나 확진자 10명중 절반은 감염경로 몰라
휴대폰 알림도, 정보도 없지만 큰 불만 없어
오히려 "한국은 왜 개인정보 다 들여다보도록 그냥 두나"
일본판 주민번호 사실상 실패… 은행에 돈넣기도 꺼려
일본인에 새겨진 전쟁의 트라우마 "국가에 내 정보 못줘" 깜깜이 방역 낳았다 [글로벌 리포트]
【 도쿄=조은효 특파원】

#도쿄 미나토구 지역주민 A씨는 지난 4월 뉴스를 통해 자택 인근 대학병원에서 코로나19 확진자 6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자체로부터 별도의 휴대폰 문자알림 서비스는 없었다. 두달이 다 되도록 해당 병원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확진자 동선 및 추가 확진자 여부와 관련한 일체의 정보도 없었다. 최근엔 집 주변 비즈니스급 호텔에서 코로나 경증자와 무증상자를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인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됐지만, 이번에도 휴대폰 문자알림은 없었다.

일본 정부나 지자체의 코로나19 확진자 동선 정보 제공은 그야말로 '깜깜이 행정'이다. 도쿄의 코로나 확진자 중 10명 중 4~5명은 감염경로 불명이다.
한국 정부가 주민등록번호제에 기반해 신용카드와 휴대폰 위치, 그 외에 CCTV 등을 통해 코로나 확진자 정보를 '분 단위'로 세세하게 공개하고, 휴대폰 문자서비스로 지역 내 확진자 발생상황을 개개인에게 수시로 안내하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국가의 개인정보 접근성이 '아날로그 행정'과 '디지털 행정'를 가르는 첫 관문인 셈이다. 상당수 일본인들은 개인정보를 통째로 관리할 수 없는 현재의 일본식 '아날로그 행정'으로는 한국과 같은 '분 단위' 확진자 동선 파악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도 확진자 동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대해 정작 크게 불평하지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한국식 K방역이 개인정보 오남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 '왜 한국에선 국가가 개인정보를 다 들여다보도록 그냥 두는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아베 정권의 코로나 방역 실책에 대한 비판에도, 일본 사회가 유독 확진자 동선 파악에 대해 관대한 것도 개인정보 노출에 대한 민감한 반응과 연결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민감성을 읽어내는 키워드로는 '패전'과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이 거론된다.

지난 26일 긴급사태 해제 직후 도쿄의 한 역에서 마스크를 쓴 채 출근하는 인파. AP뉴시스
지난 26일 긴급사태 해제 직후 도쿄의 한 역에서 마스크를 쓴 채 출근하는 인파. AP뉴시스
■ 전쟁의 트라우마...강한 국가 불신론

한·일간 개인정보의 감각 차이를 논할 때 상당수 일본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게 있다. 바로 '강한 국가'가 자행했던 '전쟁'의 쓰라린 기억이다. 일본 수도권 대학의 한 교수는 일본 사회의 개인정보에 대한 민감성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국가에 한 번 속았던 사람들이다. 코로나 방역일지라도 국가가 개인정보를 들여다보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일본인들에겐 국가의 개인정보 취득 확대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다". 40대 초반의 일본의 한 공무원은 한 마디로 '알르레기'라고 표현했다. 강한 국가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7080대 고령층뿐만 아니라, 현재의 3040대 젊은 세대들에게조차 유전자(DNA)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 정보에 대한 '감각'이 좀 다르다는 것이다.

도쿄신문의 아이사카 조 서울특파원은 최근 '코로나 대책으로 떠오른 감시사회 한국, 개인정보를 여기까지 노출해도 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타전했다. 아이사카 특파원은 7일 본지에 "한국의 K-방역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지만, 국가가 개인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일본사람들로선 아마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소득정보 노출 꺼려...장롱예금 515조원

과거 전쟁의 경험이 다소 관념적인 이유라면,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개인 자산과 소득정보를 국가에 노출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에 13자리 개인식별번호인 주민등록번호가 있다면, 일본엔 12자리 마이넘버(개인번호, 2016년 1월 도입)가 있다.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마이넘버 카드를 발급률은 16.7%, 즉 6명 중 1명 꼴에 불과하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선 이 번호를 몰라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부동산 계약은 물론이고, 신용카드 발급, 휴대전화 개통시에도 필요치 않다. 은행 거래에도 필수사항은 아니다. 일단, 마이넘버 체계에 편입되면 계좌를 통해 소득, 자산정보가 그대로 국가에 노출되고, 신용카드 사용 정보, 통신 정보 등도 이 고유식별번호 하나로 파악이 용이해진다. 상당수 일본인들은 전후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신분확인은 운전면허증, 건강보험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심지어 마이넘버를 발급받은 공무원이 25%밖에 되지 않는 점은 국가의 개인정보 취득에 대한 일본 사회의 강한 거부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마이너스 금리 체제하에선 은행에 돈을 넣어봤자, 금융자산 규모만 노출될 뿐이란 인식이 팽배하다. 미즈호증권은 지난해 일본의 '장롱 예금'(은행이 아닌 자택에 돈을 보관함)이 46조6000억엔(약 515조원, 2018년 기준)으로 추산된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일본인 특유의 현금선호 현상으로 신용카드 사용률도 저조하다. 일본 정부가 '캐시리스 사회(현금없는 사회)'를 정책목표로 내걸 정도다.

■日정부 감시사회로 '성큼'

그렇다고 포기할 일본 정부는 아니다.

최근 아베 정권은 '일본판 주민등록제'인 마이넘버를 확산시켜볼 요량으로 1인당 현금 10만엔(약 115만원)씩 지급되는 재난지원금 신청을 우편접수와 마이넘버 실물 카드가 있어야 가능한 온라인신청 두 가지로 진행했다. 일본 정부의 의도는 적중했으나, 아날로그적인 행정 시스템으로 인해 결과는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루라도 빨리 재난지원금을 손에 쥐려면, 우편보다는 온라인 신청이 낫겠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마이넘버 카드를 신청하겠다고 구청에 몰리면서, 행정이 마비지경에 이른 것이다. 심지어 온라인 신청정보와 주민대장의 기록에 차이가 있어, 구청 직원들의 수작업이 더해졌다. 결과적으론 온라인보다 우편접수절차가 빠르다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미 상당수 지자체들이 온라인 신청을 중단했다.

마이넘버 발급 해프닝에도 집권 자민당은 최근 여세를 몰아, 내년 1월에는 마이넘버를 모든 예금 계좌에 의무적으로 연결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이 기회에 국민의 자산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세금 징수도 확대하겠다는 의도다.
반발은 여전하다. 헌법상 보호되는 개인정보의 침해가 우려된다며, 제도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만 8건이나 된다.
코로나 사태를 기점으로 '디지털 행정 추진'과 '국가의 개인정보 접근성 확보'가 과연 양립가능한 지에 대한 문제가 일본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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