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시뻘건 불길이 기적처럼 방향을 튼 순간, 내 삶의 방향도 바뀌었다" [Guideposts]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9.15 17:13

수정 2020.12.24 10:45

美 오클라호마주 대형 산불에서 생존한 테리 버럴슨
강 건너에 불이 났다는 뉴스를 애써 외면한채
칠면조 사냥을 떠난 그날, 얼마 못가 마주한 것은
나를 집어삼킬 듯한 화염이었다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여러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뿐이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눈앞의 불길이 다시 멀어졌다
어떤 보호막이 지켜주기라도 한듯 목숨을 건졌다
대지는 시커멓게 타버렸지만 그 안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그분의 존재를 깨달은 내가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 기적처럼 방향을 튼 순간, 내 삶의 방향도 바뀌었다" [Guideposts]
미국 오클라호마주 에드먼드에 사는 테리 버럴슨(57)은 대형 산불과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다. 시뻘건 화염 속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 그는 "갑자기 불길이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에드먼드에 사는 테리 버럴슨(57)은 대형 산불과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다. 시뻘건 화염 속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 그는 "갑자기 불길이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북서쪽 평원에서는 수㎞에 걸쳐 초원의 목초와 삼나무 숲, 울퉁불퉁한 붉은 바위가 만든 협곡만 보인다. 하지만 쌍안경을 들여다봐도 헬리콥터가 연이어 지평선의 들불에 물을 뿌리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위로 뻗어 올라가는 작은 연기 기둥은 걱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80㎞는 떨어져 있는 데다가 사우스캐나디안강 건너편이었으니까.

그날 오후 래리 삼촌과 사촌 토니, 나는 미리 계획한 3일간의 칠면조 사냥을 위해 16㎢에 달하는 목장으로 차를 몰고 왔다. 래리 삼촌이 우리가 탈 말 3마리도 데려온 덕분에 진짜 카우보이처럼 목장 주변을 설렁설렁 거닐었다. 57세인 나는 소매업 관리직에서 반쯤 은퇴한 상태였다.

우거진 삼나무 숲과 협곡 사진을 몇 장 찍어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아내 앤디에게 전송했다. "걱정할 거 없어. 좋은 시간 보내는 중이야"라고 문자도 보냈다. 아내는 뉴스에서 들불 소식을 보고서 몇 분 전에 내게 알려주려고 전화했지만, 휴대폰 연결이 끊겼다. 앤디가 마음 졸이는 건 원하지 않았다. 아내가 어쨌거나 기도할 것임을 알았다. 만사를 하나님께 털어놓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바람이 남서쪽에서 세게 불어오면서 강해졌다. 목장 주택 옆에 있는 마구간에 말을 두고 게이터 다목적차량에 올라탔다. 래리 삼촌이 운전했고, 다음 날 수컷 칠면조를 유인해 낼 장소들을 정찰했다. 목장 주변을 감싼 좁은 자갈길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이곳저곳에서 차를 세우고 칠면조의 흔적을 살폈다. 래리 삼촌이 차를 돌려 목장 주택이 있는 남쪽으로 향하기 전까지 1.6㎞가량 이동했다. 그러는 사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높이 치솟은 불의 벽이 우리 쪽으로 질주해 오고 있었는데 불과 1.2㎞ 정도 떨어져 있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요!"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우리는 불에 접근하고 있었다. 길에서 나올 때까지 그랬다. 튼튼한 철조망 울타리가 길을 막아섰다. 게이터가 울타리를 통과할 방도는 없었다. 래리 삼촌, 토니, 나는 뛰어내려서 반대편으로 허둥지둥 움직였다. 하지만 별 상관없었다. 도보로는 가망이 없었으니까. 아내에게 전화했다.

"불에 둘러싸였어. 911에 전화해 줘! 우리를 여기서 구해 낼 헬리콥터가 필요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래리 삼촌이랑 토니는 어디 있지? 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주변 몇 m 이상은 볼 수가 없었다. 다른 두 사람을 찾아 소리를 질렀다. 들리는 건 삼나무가 터져 나가는 소리뿐이었다. 건초가 팝콘처럼 탁탁 소리를 냈다. 무시무시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다시 휴대폰을 찾아보았다. 없었다.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전화만이 바깥세상과 연락할 유일한 수단이었는데.

연기로 숨이 막히지만 무턱대고 비틀비틀 걸었다. 화염이 뻗어나와 내 옷을 태우며 날 뒤쫓았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못한다면 연기 흡입으로 죽게 되겠지. 무릎을 꿇고 거칠게 숨 쉬며 얼굴을 땅바닥 가까이에 댔다.

이때처럼 하나님을 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하나님의 도움이나 사랑을 마땅히 받을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디는 매일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나는? 일, 가족, 일과처럼 삶의 다른 모든 것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시했다. 내가 하나님을 진실로 느끼는 유일한 때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수년간 격주 주말에 2시간 동안 차를 몰고 가서 어머니를 챙기고 집 잔디를 깎았다. 귀갓길에 털사를 벗어나면서 옛 가스펠 음악을 틀어주는 방송국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오클라호마의 드넓은 하늘이 내 앞에 펼쳐졌다. 창조주의 품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여기는 나 혼자뿐이었다. 연기 속에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꽃이 날 물어뜯었지만, 협곡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잠시 내가 불보다 위쪽에 있었다. 400m쯤 떨어진 서쪽에 불길이 닿지 않고 삼나무가 없는 평지가 보였다.

반쯤 달리고 반쯤 휘청거리다가 땅 위에 쓰러졌다. 심호흡했다. 몇 분 후, 일어나려고 기를 썼다. 연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다시 땅에 쓰러졌다. 뒤를 돌아보았다. 우뚝 솟은 화염만 보였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쪽 길로 갔다가 다른 길로 갔지만, 불길이 날 뒤쫓았다. 어찌어찌하다 이미 다 타버린 공간에 들어섰는데 지면까지 까맣게 탔다.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모를 일이다. 무엇인가가 날 실어 나른 듯했다. 타다 남은 나무 위에 누웠는데 두피와 등에 화상을 입어 물집이 잡혔다.

"하나님, 제발 좀 살려주세요."

절박하게 외쳤다. 몇 년 만에 처음 드린 기도였다. 하나님의 호의를 기대하기에는 내가 너무 늦었다는 걸 알았다. 그저 하나님께서 아내를 위해 계셔주기를 바랐다.

"제가 사랑한다는 걸 앤디가 알게 해주세요."

작게 속삭였다. 뜨거운 바람이 먼지와 재를 내 쪽으로 몰아왔다. 불은 나보다 높은 곳에서 타오르며 바람 바로 뒤편에 있었다.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서 손수건을 찾았다. 코와 입을 막았다. 눈을 꼭 감았다. 그저 화염이 날 덮치기 전에 기절하기만을 바랐다. 1분이 지났다. 그러다 2분이 지났다. 감히 엄두를 내어 눈을 떴다. 화염은 고작 몇 m 거리에 있던 방화대를 끝까지 태워 버리고 이제는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기적이었다.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검게 변한 삼나무가 전원지대에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누군가 날 찾는 중일까? 헬리콥터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풍차와 콘크리트 포장 위로 크고 둥근 저장탱크가 보였다. 불을 피해 누울 만한 곳이었다. 찾아낸 차가운 물에 손수건을 적셔서 얼굴에 묻은 그을음과 재를 닦아내고 입술을 적셨다.

콘크리트에 주저앉았다. 공기는 여전히 매캐했다. 연기로 죽기 전에 얼마나 더 숨 쉴 수 있을까? 아침까지 살아 있기는 할까? 앤디와 아이들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할 수 있길 바랐다. 멀리서 삼나무가 불꽃놀이처럼 터지고, 화염이 진행 방향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불길이 날 에워싸고 있었으니 어떻게 생각하든 불이 나까지 집어삼켰어야 했다. 그렇지만 보호막이 지켜주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맹위를 떨치는 불 속에서 목숨을 건졌다.

위를 보았다. 헬리콥터 불빛이 잽싸게 하늘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두 번 지나가는 일은 없었다. 누구도 날 보지 못했다. 웅장하고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눈이 담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곳까지 광경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하늘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어머니댁에서 운전해서 돌아오던 길뿐이었다. 그때 강하게 느꼈던 하나님의 임재.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셨다. 오늘 하나님께서 날 불길에서 보호해 주셨다. 아내의 기도와 아내가 분명 교회 사람들에게 부탁했을 기도를 떠올렸다. 그들의 사랑까지 느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딱딱한 콘크리트 위에서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전에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감사합니다, 주님. 절대 절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아내와 아이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삶에 감사합니다."

기도하는데 마치 오랜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쉬이 흘러나왔다. 놓쳐버린 시간을 만회하려고 밤새도록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주님께 이야기했다. 동틀 무렵 걷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픽업트럭을 보았다. 두 남자가 내렸다.

"밤새 여기 있었어요? 우리는 석유 시추시설로 출근하는 중이었는데 당신이 도움을 받게 해줄게요. 당신은 운좋은 사람이네요." 남자 중 한 명이 물었다.

"물 좀 있으세요?" 은색 SUV가 멈춰 설 때쯤 나는 물병 세 개째를 단숨에 비워내고 있었다. 내 아들 조던, 사위 마크와 션, 좋은 친구인 돈이 차에서 내렸다. "살아 계세요!" 그들이 외쳤다. 한 명이 내 귀에 전화를 대주었다.

"다 괜찮을 거야. 사랑해." 아내가 말했다. 그들은 래리 삼촌과 토니도 무사하다고 전해주었다. 말들도 살아남았다. 헬리콥터가 오클라호마시티에 있는 화상병동으로 날 이송했다. 헬리콥터가 이륙할 때 저 아래 펼쳐진 까맣게 타 버린 풍경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철저히 파괴되었다. 1133㎢ 이상이 불탔다. 하지만 나는 암흑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내가 살아남은 건 불길이 기적적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도 방향을 바꾼 덕분이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