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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미국 대선 TV토론 단상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0.04 18:03

수정 2020.10.04 18:03

[fn논단] 미국 대선 TV토론 단상
우리나라 교육이 암기에만 치우쳐 말하기·쓰기와 같은 자기표현이나 상대방 설득 등 기본능력을 외면한다는 지적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나 혼자만이 아닌, 너와 내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대등 인격체들의 집합인 민주주의 사회에는 가치관과 이해관계의 차이가 불가피하다. 차이에서 오는 갈등 조정은 사회 존속에 필수불가결한데, 민주사회에서는 상대방 존중에 바탕한 의견교환 끝에 합의를 도출하는 메커니즘을 예정한다. 그 핵심도구인 자기표현과 설득의 정화 중 하나가 토론이고,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것이 대통령선거 TV토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차례 전례에서 후보들이 합리적 근거도 없이 허황된 공약을 강변하거나 상대방 비난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국민을 실망시켰다. 그런데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17년 대통령선거에서 승패를 가른 요인 중 하나가 TV토론이었다고 하니 파급력을 알 만하다.


유럽과 미국의 학교교육이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질과 교양을 함양하고 토론을 통한 합의도출의 경험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정수의 하나가 미국 대선토론이다. 1960년 케네디-닉슨으로 시작된 TV토론 이후 대부분은 후보의 비전과 정책을 정제된 모습으로 잘 보여줘 대선의 방향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의 대선토론 역시 미국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도입된 것이다.

그러던 미국 대선토론이 망가졌다. 9월 26일 치러진 트럼프-바이든 후보 간 TV토론은 막장토론이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한 후보는 포퓰리즘적 주장과 인신공격에 더해 상대방의 말을 수시로 방해하는가 하면, 다른 후보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독설을 내뱉곤 했다. 신파시스트 극우그룹인 프라우드 보이스에 대해 "물러서 대기하라(Stand back and stand by)"고 답하자 이들이 사실상 집단행동을 공인한 것으로 받아들여 열광했다니 말문이 막힌다.

필자는 2000년 대선에서 결정적 개표오류가 의심됐는데도 국가통합에 균열을 우려한 앨 고어 후보가 연방대법원 판결에 승복한 것을 뉴욕에서 목격하고 의아했던 경험이 있다. 이 사건은 결함과 모순투성이인 미국 민주주의의 성공비결을 설명하는 사례로 자주 인용됐고, 필자는 고심 끝에 간신히 이해하는 척이나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은 선거에서 자신이 지면 불복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떠들고 있으니 웬일인가. 미국에서는 저녁 토크쇼마다 대선토론을 비아냥거리느라 바쁘고 주요 언론들은 국가적 망신이라고 탄식하는가 하면, 유럽에서는 미국 몰락의 징조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필자 세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 대부분 분야에서 미국 제도를 모범으로 배워왔다. 그런데 그동안 자유민주주의와 자유무역체제가 정답이라고 독려하던 미국이 이제는 패권 유지를 위한 자국우선주의에 몰두하고 호통치는 것이 거시적 현실이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에 더해서 이제는 민주사회 의사형성의 기초마저 처참하게 허물어지는 현장을 생생하게 봤다. 늑대들이 울부짖는 광야에 눈만 쌓이고 선인의 발자국은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길을 과감하게 개척하는 용기가 절실하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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