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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의 나라' 일본, 20년만에 다시 꺼낸 脫도장 [글로벌리포트]

조은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0.11 17:16

수정 2020.10.12 23:33

디지털 행정 속도내는 스가 총리
2000년 김대중정부 시절
일본도 전자정부 추진했지만
10년뒤 한국은 유엔 평가 1위
서류 만능주의 못벗은 일본
팩스로 확진자수 집계하고
재난지원금 서류 우편으로 받아
"절차주의·IT포비아가 원인"
디지털청 설립만 1년은 걸리고
지자체간 시스템 연결도 과제
'서류의 나라' 일본, 20년만에 다시 꺼낸 脫도장 [글로벌리포트]
【도쿄=조은효 특파원】 "(서류에 찍는) 도장을 빨리 없애고 싶다."(고노 다로 행정개혁상),

"중요한 것은 스피드다. 지금까지 업무 방식으로는 총리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히라이 다쿠야 디지털 담당상)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도장 행정'을 정권의 '1호 적폐청산' 과제로 삼고, 속도전으로 몰아칠 태세다. "기득권과 전례를 혁파하자"는 구호아래, 디지털 행정 나아가 디지털 경제 사회로 첫 발을 내딛는 상징으로, 아날로그 행정으로 대변되는 도장부터 없애버리겠다는 것인데, 이름하여 '탈 도장전(戰)'이다. 디지털 변환(DX)을 스가노믹스(스가 정권의 경제기조)의 중심 축으로 삼고, 디지털 엔화 및 모바일 화폐, 디지털 교과서, 인공지능(AI), 6세대 통신(6G)추진 등 전방위적으로 전선을 넓힐 태세다.
정계 입문 전 후지제록스에서 7년을 근무한 '정계의 이단아' 고노 다로 행정개혁상(장관)과 자민당의 IT전략통인 히라이 디지털담당상이 그 전면에 섰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AP뉴시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AP뉴시스

■ 한·일 똑같이 출발했는데

메이지 시대인 1873년 공식 서류에 도장을 찍기 시작한 이래, 150년 가까이 일본 사회를 지탱해 온 도장사회와 결별하겠다는 스가 정권을 향한 일본 사회의 시선은 한 마디로 '과연 그럴까'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전자정부 추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전자정부는 한국 김대중 정부만 추진한 게 아니었다. 일본도 추진했었다. 모리 요시로 총리는 "5년 이내에 세계 최첨단의 IT국가가 되는 게 목표로 한다"며 'e-재팬' 전략을 간판 정책으로 삼았다. 2000년 양국은 그렇게 전자정부에 페달을 밟는가 싶었다. 이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역시 'e-재팬'2탄을 제시하며, 2006년까지 전자정부를 구축하겠다고 공언했었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2010년, 한국이 유엔의 전자정부평가에서 1위 국가(2001년 첫 평가 15위)로 평가된 반면, 일본은 우왕좌왕했고,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현재, 양국의 대국민 서비스는 극명히 갈렸다.

행정안전부는 유엔(UN)이 발표한 '2020년도 UN 전자정부평가' 결과 한국이 193개 회원국 가운데서발전지수 부문 2위, 참여지수 부문 1위를 차지했다고 11일 밝혔다. (그래픽=행정안전부 제공)
행정안전부는 유엔(UN)이 발표한 '2020년도 UN 전자정부평가' 결과 한국이 193개 회원국 가운데서발전지수 부문 2위, 참여지수 부문 1위를 차지했다고 11일 밝혔다. (그래픽=행정안전부 제공)

한국이 재난지원금 신청부터 입금까지 단 몇분 걸린 반면, 일본은 우편으로 재난지원금 서류를 받아, 회신, 통장 입금까지 한 달여가 걸렸다. 온라인 신청도 이뤄졌지만, 마이넘버카드(주민등록증)보유가 전제였고, 뒤늦게 마이넘버 카드를 신청하겠다는 사람들이 구청에 몰리는 바람에 구청 행정이 일시 마비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에 앞서 대만이 스마트폰으로 가까운 약국의 공적 마스크 재고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반면, 중국산 마스크가 대거 풀리기 전까지 몇 달간 일본에서는 '발품을 판 자' 온라인몰에서 '손가락이 빠른 자'만이 마스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퇴근 무렵 오후 6시께 점포들이 마스크를 푼다거나, 새벽에 마스크가 입고된다든지 하는 정보가 매우 중요했다. 코로나19 확진자 집계는 익히 알려진대로 팩스 집계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일본의 디지털 후진성을 가리켜 '잃어버린 20년'이라며 개탄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왜 실패했었나
다케모토 나오카즈 과학기술IT담당상. AP뉴시스
다케모토 나오카즈 과학기술IT담당상. AP뉴시스

"컴퓨터를 직접 만져 본적 없다." "USB라는 게 뭔가 구멍에 넣는 것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난 잘 모르니 전문가가 답하도록 하자." 지난 2018년, 당시 일본의 사이버 정책을 총괄하는 사쿠라다 요시타카 사이버보안 담당 장관이 일본 국회에서 답변 내용이다. 혀를 찰 발언이었으나 그는 용감했다.

역시 아베 정권 때인, 불과 지난 6월의 일이다. 다케모토 나오카즈 과학기술·IT 담당상이 일본의 도장업계 이익을 대변하는 일본의 도장제도와 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약칭 도장의원연맹) 회장을 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설에 올랐다. "디지털화와 도장 문화의 양립을 목표로 한다." 당시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말하자면, '재택근무를 하라면서, 출근 도장을 찍으러 회사로 나오라'는 말과 같은 소리다. IT산업에 대한 아베 정권의 자세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들이다. 아베 정권 뿐만 아니라 사실 그 앞의 정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직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인 시오바라 도시히코 고치대 교수는 최근 아사히신문 계열 주간지 론자(논좌)에 과거 전자정부 추진의 실패 원인으로 △정권의 의지와 관심부족 △관료들의 '테크노 포비아(기술 공포증)' △방대한 문서와 절차주의 △IT인력 부족 등을 꼽았다. 한 번도 정권의 중심에 놓이지 않았다는 게 이 모든 원인을 가로지르는 핵심이다. 그리곤 덧붙엿다. "이대로 했다간 100% 실패한다."

일본 관가에서는 스가 총리가 내년에 신설되는 디지털청장에 민간 전문가를 영입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용인술'이 아니고서는 이 난국을 뛰어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디지털청 자체가 천재 해커 출신의 30대 장관인 오드리 탕이 이끌고 있는 대만의 디지털부를 모델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도를 수입해서라도, 바꿔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스가 정권의 디지털청 설립을 주도하고 있는 히라이 다쿠야 디지털 담당상. 로이터 뉴스1
스가 정권의 디지털청 설립을 주도하고 있는 히라이 다쿠야 디지털 담당상. 로이터 뉴스1

日관가 '탈도장화' 새 구호로

최근엔 도쿄 시부야구가 행정 서비스를 개혁해보겠다고 스타트업 기업과 손잡고 라인(LINE)앱을 통한 주민등록등본 발급 신청 서비스를 실시했다가 일본 총무성으로부터 제소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용자가 라인으로 자신을 증빙할 수 있는 사진, 신분증 등을 보내면, 며칠 뒤 등록된 주소지로 등본을 우편으로 보내주는 서비스다. 중앙정부가 밀고 있는 일본판 주민등록제인 마이넘버 확산 걸림돌이 될까 촘촘하게 규제망을 들이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도장만 없앤다고 디지털 행정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봉착하게 되는 사건이다. 사실, 도장이나 서명은 이미지 파일로 만들어 클릭만 하면 된다. 한 마디로 종이 서류에 도장을 직접 찍는 것을 없애는 것 정도는 초보적인 단계의 디지털화다.

진짜 과제는 모든 중앙 정부 행정 절차가 완결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적으로 이뤄지느냐에 달려 있다. 중앙 정부가 손 놓고 있던 사이, 일본의 1700개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도입한 행정 시스템은 일일이 어떻게 연결할 것이며, 국민의 소득과 조세, 금융계좌, 복지 정보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가. 나아가 사회 전반의 디지털 변환은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가. '탈도장'을 새 구호로 삼고 있는 스가 정권이 넘어야 할 산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디지털화를 추진하기 위한 디지털청 설립에만 1년이 걸린다.
일본 정부 스스로도 집에서 등본을 떼볼 수 있는 정부24 같은 시스템까지 구축하려면 최소 5년을 예상하고 있다. 임기가 이제 고작 11개월 남은 스가 총리로서는 일모도원(날은 저무는데 갈길은 먼)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재임을 위해서라도 전에 없이 속도를 외치는 이유인 것이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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