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의 특급논설] 2021 신년사 누가 무슨 말 했나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1.01 15:31

수정 2021.01.27 10:10

힘 넘치는 윤석열, 힘빠진 추미애 
경제 낙관 홍남기, 신중한 이주열 
노사관계는 올해도 대충돌 예고 


[파이낸셜뉴스] 신년사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 사람, 자리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중국 고사성어를 즐겨 인용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척 보면 아하 이 사람은 경제학자 출신이구나, 이 사람은 기자 출신이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다. 아랫사람이 대필한 신년사도 결국은 자기 몫이다. 2021 신축년 신년사를 훑어보자.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뉴스1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뉴스1

윤석열 vs. 추미애


제일 힘이 느껴지는 건 역시 윤석열 검찰총장의 신년사다. 2020년은 윤 총장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다.
권력이 두 번이나 밀어내려는 걸 보란 듯이 튕겨냈다. 윤 총장은 신년사에서 ‘국민의 검찰’을 말했다. 스스로 그 뜻을 “오로지 그 권한의 원천인 국민만 바라보고 좌고우면하지 않는 것”이라고 풀었다. 듣기에 따라선 귀에 거슬리는 이들도 꽤 있을 성싶다. 어쩌랴. 오는 7월 임기 2년을 채우기 전엔 윤 총장이 물러날 것 같지 않다.

추미애 법무장관의 신년사는 맥이 빠졌다. 어쩔 수 없다. 이미 후임(박범계 민주당 의원)까지 정해진 마당이니. 게다가 구치소 재소자들이 코로나에 집단으로 감염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추 장관과 법무부가 코너에 몰렸다. 추 장관은 “수사권 개혁과 공수처 출범 등 새로운 형사사법 절차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해달라”고 당부했다. 추 장관 특유의 가시돋힌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홍남기 부총리(왼쪽)와 이주열 한은 총재./뉴스1
홍남기 부총리(왼쪽)와 이주열 한은 총재./뉴스1


홍남기 vs. 이주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이후이(死而後已)를 말했다. 신년사 단골 메뉴인 중국 고사성어가 짜잔 등장했다. 새해 우리 경제가 세찬 맞바람을 뚫고 도약할 수 있도록 정부가 앞장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제갈량은 주군으로 모시던 유선에게 전·후 두차례 출사표를 냈다. 유선은 유비의 아들로, 촉나라 두 번째 군주다. 후출사표 마지막 문장에 사이후이가 나온다. 죽어서야 그 일을 그치겠다, 곧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뭘? 당시 최강국 위나라를 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다짐은 했지만 이루진 못했다. 제갈량은 국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기도 전에 그만 병사하고 만다.

홍 부총리의 신년사엔 또 V자 회복이 나온다. 빠르고 강한 경기 반등을 말한다. 세계적으로 백신이 보급되면서 V자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세상을 보는 시각은 홍 부총리와 사뭇 다르다. 이 총재는 신년사에서 “일부 국가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지만…팬데믹의 종식 시기를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다”고 봤다. 나아가 이 총재는 K자형 경기회복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위·아래로 가위처럼 갈라진 알파벳 K는 부문간, 계층간 불균형을 보여준다. 예컨대 대기업과 고소득층은 새해 경기가 회복세를 타면 그 혜택을 왕창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 저소득층은 한동안 차가운 불황의 윗목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외환위기 때도 그랬고, 금융위기 때도 그랬다. 경제위기는 작은 기업, 저소득층에 유난히 가혹하다. 기재부가 낙관론자라면 한은은 천생 비관론자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왼쪽)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뉴시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왼쪽)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뉴시스


이낙연 vs. 김종인


정치권으로 가보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기자 출신이다. 문장이 쉽고 간결하다. 신년사는 “괴로웠던 2020년이 지나고, 2021년이 밝았다”로 시작한다. 하지만 내용은 전체적으로 집권당 대표답다. “디지털과 그린의 미래를 향해 담대하게 전진하겠다,” “사회갈등을 완화하고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는 내용이 그렇다. 기업인이 들으면 무슨 소린가 하는 대목도 있다. 이 대표는 “기업인의 야성을 북돋는 활기찬 경제를 세우자. 그 일에 (민주당이)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회는 기업 규제법안을 무더기로 통과시켰다.민주당은 그 일에 매진했다. 기업인 입장에선 “병 주고 약 주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이다.

여당보다는 야당 신년사가 더 흥미로운 법이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문재인정부 실정이 극에 달하면서 나라가 극도의 혼란과 위기 속에 있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치의 창조적 파괴, 파괴적 혁신의 원동력은 오직 국민의 힘에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를 혁신의 본질로 봤다. 김 위원장은 이걸 한국 정치에 대입했다. 서강대 경제학 교수 출신답다. 이어 김 위원장은 국민의힘이 “제구포신의 자세로 변화하고 혁신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김 위원장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으려 할 때마다 당내에선 노선 투쟁이 벌어진다. 올해 국민의힘 안에서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펼치는 제구포신(除舊布新)이 이뤄질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왼쪽)과 손경식 경총 회장./뉴시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왼쪽)과 손경식 경총 회장./뉴시스


노조 vs. 경총


노조와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앙숙이다. 노사관계에서 수시로 충돌한다. 손경식 경총 회장은 신년사에서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상법, 공정거래법, 노동조합법은 후속 보완 입법을 강구해달라”고 말했다. 노사관계의 후진성을 지적하며 “노동시장 개혁을 서둘러 추진해야 할 때”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노조가 들으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할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 김동명 위원장는 작년 말 국회 앞 천막농성 투쟁을 회고하며 “싸우지 않으면, 투쟁하지 않으면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신년사에서 말했다. 그러면서 “끝까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재계가 가장 아파할 대목을 콕 찔렀다. 지난해 연말부터 단식 농성에 들어간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은 따로 신년사를 내지 않았다. 양 위원장 역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 노사관계도 평탄하기는 글렀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신축년 새해를 맞이하는 메시지를 페이스북 등 개인 소셜미디어에 게시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신축년 새해를 맞이하는 메시지를 페이스북 등 개인 소셜미디어에 게시했다. /뉴시스


문 대통령과 北 김정은 위원장


문재인 대통령은 정식 신년사에 앞서 SNS 메시지를 냈다.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란 대목이 눈에 띈다. 느리지만 오히려 믿음직하다는 뜻이다. 코로나 사태에 지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신축년 소띠 해와 잘 어울리는 메시지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한 뒤 인터넷에서 노공이산이란 아이디를 썼다. 고사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에서 따온 말이다. 꾸준하다는 면에서 황소걸음은 우공이산과 닮았다. 문 대통령의 공식 신년사는 며칠 뒤에나 나올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는 1월7일 신년사를 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올해는 신년사를 건너뛰고 새해 연하장으로 대체했다. 김 위원장은 “새해를 맞으며 전체 인민에게 축원의 인사를 삼가드린다”며 “인민의 이상과 염원이 꽃필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하여 힘차게 싸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덕담에 그친 느낌이다. 통상 북한 신년사는 한해 정책 방향을 엿볼 수 있는 가늠자 역할을 했다. 올해는 그마저도 사라졌으니 귀동냥으로 근근이 버티는 북한 전문가들이 더 답답하겠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새해를 맞아 인민들에게 친필 서한을 보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일 1면에 보도했다./뉴스1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새해를 맞아 인민들에게 친필 서한을 보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일 1면에 보도했다./뉴스1


장삼이사의 새해 결심은 작심삼일로 끝나기 일쑤다.
하루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변화무쌍한 세상이다. 백신은 나왔지만 코로나 사태 추이도 예측불허다.
신년사 가운데 두루 좋은 내용만 현실이 되면 좋겠다.

[곽인찬의 특급논설] 2021 신년사 누가 무슨 말 했나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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