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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시평] 여성단체는 왜 존재하는가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1.26 18:00

수정 2021.01.26 18:05

[fn시평] 여성단체는 왜 존재하는가
국가인권위원회는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피해자에게 한 성적 언동은 성희롱이라고 판단했다. 조사를 시작한 지 5개월여 만에 피해자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한 것이다. 늦은 밤 피해자에게 보낸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이모티콘 등 증거는 많이 있었지만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늦었지만 진실을 원하는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이 치유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짚어야 할 문제가 아직 있다. 피해자의 경찰 신고과정에서 박 시장에 대한 고소내용이 여성단체장들을 통해 유출됐음이 밝혀졌고, 유출과정은 경찰에서 조사 중이다.
누출의 발단은 피해자의 변호사가 여성단체 대표인 A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A는 또 다른 여성단체 대표인 B에게 전달했고 B는 C에게, C는 민주당 남인순 의원에게, 남 의원은 박 시장의 전 젠더특보에게 이런 사실을 전달했다. 박 시장에게 전달되는 5단계 과정은 일사불란하게 순식간에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법적인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문제다. 전달자들이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운동을 하는 여성단체의 대표들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특히 남인순 의원은 여성운동 리더로서, 국회의원까지 됐다. 그녀가 성폭력 피해자보호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다. 이번 사건에서 보인 전달자들의 행태는 피해자 보호보다는 개인적 인연이나 정파의 이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남 의원이나 젠더특보는 전달하지 않았고 질문했다고 하지만, 질문을 통해 "너 신고 당했으니 알고 있느냐? 잘 대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최근 피해자의 가족들은 남 의원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라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여성단체의 존재 의의를 생각해본다. 한참 전의 일이다. 현직 여성계 주요 인사가 갑자기 정치권으로 직행했다. 그녀의 행보를 보고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입법을 통한 정치활동도 중요하지만 그런 사례가 계속 늘지 않을까, 여성운동의 목적보다 당의 이념이 앞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십수년이 흐른 지금,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정치권과 적당한 거리두기에 실패하게 되면 피해자를 진영논리로 이분화하는 함정에 빠지게 되고, 결국 여성들은 물론이고 전체 국민들의 공감도 받지 못하게 된다. 여성단체 업무를 맡았던 공무원들도 단체업무가 무척 힘든 업무라고 고충을 토로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이 바뀌는 것도 그렇고, 단체장 선출할 때의 갈등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단체의 장이 되면 주요 위원회에 선임되고, 정치권의 관심을 받는 등 이익이 많아서 그런지 소송이 제기된 적도 있다고 했다. '약자인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한 여성단체는 지금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눈빛을 그들의 눈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여성운동은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아직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서 정치권이 다루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이슈 제기와 대안을 모색하거나 정부를 견제하는 시민단체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또 여야를 떠나 피해자를 위해 한목소리를 내기를 바란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세라 로즈 캐버너 교수는 최근 발간한 저서 '패거리 심리학'에서 나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사람마다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여성운동에서만큼은 나쁜 사람에 대한 기준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래야만 여성운동의 정당성도 인정받고, 실질적인 성평등 사회를 위한 본래의 목적 달성도 가능할 것이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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