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거수기' 사외이사?.."감시·견제 못 하면 수천억 물어낼 수도"

안태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3.20 08:00

수정 2021.03.20 08:36

ESG 경영 화두..대기업 사외이사 다양성 경쟁 중 
조언자 역할은 충실, 감시는 여전히 어려운 구조
'감사 분리선출·3%룰' 사회이사 제 역할 시험대
[파이낸셜뉴스]
사진=뉴시스
사진=뉴시스

"감읍할 따름이죠. 사외이사 해달라고 연락받은 입장에서는. 별로 하는 거 없이 돈을 몇백만원씩 받으니까."

지난 2016년 작성한 기사의 도입부입니다. 대기업 사외이사이자 감사위원인 A교수와의 대화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당시 대우조선해양의 대규모 분식회계 논란에 경영진을 감시할 의무가 있는 사외이사, 감사위원에게도 비판의 화살이 향했습니다. <관련기사-'거마비'만 받는 거수기로 전락한 감사위원... 주주대표소송 등 제도 개선 필요 2016.02.03>

사외이사는 말 그대로 회사 경영진에 속하지 않는 이사를 말합니다. 외부인사를 이사회에 참가 시켜 대주주의 독단경영과 전횡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입니다. 사외이사는 경영진 판단을 감시하는 감사위원도 맡습니다.
하지만 그간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거셌습니다. 대주주, 경영진과 친분이 있거나 정권과 가까운 인사에게 자리 하나 나눠주는 정도에 그쳤다는 지적입니다. 이사회에 잠시 참석해 찬성표만 던지고 떠나는 '거수기'라는 조롱이 나온 이유입니다.

■사외이사 다양성..노동·철학 전문가도 영입

최근 사외이사 구성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 재계 화두로 떠오른 덕입니다. 기업이 다양성을 갖춘 사외이사 모시기 경쟁에 나서고 있는데요. 법조인, 전직 관료, 경영·경제학 교수 등으로 한정됐던 사외이사진 구성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경영권 분쟁 중인 금호석유화학은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을 사외이사로 추천해 관심을 모았습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당시 파면 결정을 내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난해 한화그룹은 이석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삼성SDI는 박태주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사외이사로 모신 바 있습니다. 이례적으로 철학, 노동 분야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선임한 겁니다.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금호석유화학 사외이사 후보에 오르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전 헌법재판관이 지난 2017년 3월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을 선고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금호석유화학 사외이사 후보에 오르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전 헌법재판관이 지난 2017년 3월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을 선고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런데 이같은 다양성을 갖춘 만큼 경영진 감시 역할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만 챙기고, 사외이사는 여전히 '거수기'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재계 관계자와 관련 전문가들을 두루 취재해봤습니다. '조언자' 역할은 나름 잘 수행하는 편이지만 아직 '감시·견제' 측면에서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조언자 역할엔 충실..의결 전 사전 조율

한 재계 관계자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외이사를 모신다는 것 자체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견을 구하겠다는 의도"라며 "(사외이사분들이) 이사회에 참석해 안건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이사회 안건에 대해 사외이사들이 찬성표만 던진다는 비판을 언급했습니다.

실제 사외이사의 이사회 안건 찬성률은 매우 높습니다. 기업 경영 평가사이트 CEO스코어의 조사 결과 2019년 대기업의 사외이사 안건 찬성률은 99.59%에 달했습니다. 국내 59개 대기업집단 상장 계열사 267곳의 이사회 안건을 모두 조사한 결과입니다.

대기업 감사보고서를 살펴봐도 간혹 '불참'은 보여도 '반대'했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이사회에 안건을 올리기 전에 사외이사를 찾아뵙고 의견을 전해 듣는다"며 "사전에 조율된 안건이 올라온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사외이사도 법적 책임이 있고, 사회적으로 저명한 분들"이라며 "거수기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에 충분한 조언을 건네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서 올라와있는 한 대기업 이사진의 주요 의결 사항. 홈페이지 캡처.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서 올라와있는 한 대기업 이사진의 주요 의결 사항. 홈페이지 캡처.

■"대주주 눈치 보여"..감시·견제는 여전히 미흡

하지만 경영진을 감시·견제하는 역할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대주주가 직접 회사를 경영하는 경우 사외이사도 대주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겁니다. 대기업 사외이사 이력은 대외적으로 내세우기도 좋거니와 연봉도 나쁘지 않습니다. 보통 5000만~8000만원의 연봉을 받습니다.

사외이사 경험이 있는 B씨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회사라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언자의 역할을 할 순 있다"면서도 "대주주가 직접 경영하는 경우엔 대주주가 사외이사의 고용주인 셈이다. 본연의 역할인 감시, 견제는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또 "(대주주가 직접 경영하는 경우에) 사외이사는 상법상의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사외이사가 꿀보직?..수천억대 소송당하기도

이처럼 감시·견제가 쉽지 않은 구조라고 해서 사외이사직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엄연히 법적 책임이 있는 '이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대우조선해양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과거 대우조선해양에서 5조원 규모의 역대급 분식회계가 밝혀지면서 사외이사들도 고초를 겪었습니다. 경영진에 대한 감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2015년 9월부터 관련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전체 소송 규모 약 3200억원 중 사외이사가 피고로 특정된 사건만 약 2200억원에 달합니다.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 본사 사옥. 사진=뉴스1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 본사 사옥. 사진=뉴스1

5년간의 소송 끝에 지난 4일 사외이사들은 분식회계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분식회계가 벌어지고 있을 때 사외이사들이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이들이 분식회계를 의심할만한 정황이 전혀 없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겁니다. 하지만 수천억원대 손해배상이 걸린 재판을 이어온 사외이사들이 겪은 심적 고통은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이번 소송을 진행한 김도형 법무법인(유한) 바른 변호사는 "감사위원회와 이사회가 견제와 균형을 이뤄가는 것이 ESG 경영의 핵심 이념"이라며 "가끔 회사를 방문하면서 거수기 역할을 하는 대가로 수천만원의 연봉을 받는 것이 사외이사라고 생각했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사외이사들도 개인의 자기방어 목적은 물론이고 회사의 종국적인 발전을 위해 외부 전문가와의 소통과 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짚었습니다.

■"사외이사가 제 역할 해야 기업 가치↑"

이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한 개정상법이 작년 말부터 적용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새로 감사위원을 선임해야 하는 회사는, 감사위원 중 최소 1명 이상을 이사와 분리 선출해야 합니다. 최대주주 등이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 3% 이상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규정도 도입됐습니다.

40% 지분을 보유했든 5% 지분을 보유했든 감사위원을 선임할 땐 모든 주주가 최대 3%의 지분만으로 표 대결에 나서게 됩니다. 대주주에 비해 적은 지분을 보유한 이들이 뭉친 뒤, 자신들이 추천한 감사위원을 선임시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죠.

지난 17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 52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뉴스1
지난 17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 52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뉴스1

김도형 변호사는 이미 개정상법에 따른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형식적인 감사기구가 아니라 내부감시와 자율감시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감사위원회와 이같은 감사위원회에 경영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보여주려는 경영진의 자문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감사위원이 제 역할을 해야 기업가치 또한 증대된다고도 말합니다. 김 변호사는 "국내 기업의 주가가 비슷한 수준의 외국기업에 비해 낮게 형성되고 있다"며 "우리 기업들이 공시 등을 통해 제공하는 자료의 신뢰도가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에 비해 낮은 탓"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기업이) 이번 상법 개정이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며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보다 강화하고 준법경영 의지를 보여준다면 투자자들 이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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