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

[곽인찬의 특급논설] 백신 특허 유예? 쉽지 않다에 한 표

인류애 호소 목소리 높지만
美 백신 주도권 놓지 않을 것
게이츠는 안전성에 우려 제기

한국은 바이오 강국이 목표
강력한 특허 보호가 더 유리


[곽인찬의 특급논설] 백신 특허 유예? 쉽지 않다에 한 표
장혜영 정의당 의원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코로나19 백신 특허권 유예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백신은 '인류 공공재'라 주장하며 '특허권을 풀어 생명을 구할 것'을 촉구했다.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백신격차(Vaccine Divide)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다. 미국과 유럽 같은 선진국, 부자나라가 코로나 백신을 싹쓸이해서다. 백신 70%가량이 부자나라에 몰렸다. 한쪽에선 남아도는 데 다른쪽에선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해법으로 백신 지적재산권(IP)를 일시 유예하자는 말이 나온다. 복제 백신을 대량 생산해서 백신 빈국에 넉넉히 풀자는 얘기다. 휴머니즘 잣대로 보면 흠 잡을 데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될까?

◇남아공, 인도가 주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지난해 10월 인도와 함께 세계무역기구(WTO)에 백신 특허를 유예하자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의 특허 관련 조항을 일시 유예하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제안은 지난해 미국 등 선진국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표류 중이다.

남아공 등은 5월 5~6일 열리는 WTO 이사회에서 반격을 노린다. 그동안 세력도 키웠다. WTO를 이끄는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신임 사무총장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특허 유예에 찬성이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세계보건기구(WHO)를 이끄는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굳은자 지지층이다.

여기에 지구촌 저명인사들도 힘을 보탰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현 러시아) 대통령 등 전직 정부 수반들과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등 저명인사 170여명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특허 유예를 촉구하는 공동서한을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도 백신격차를 줄이는 데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문 대통령은 작년 11월 주요 20개국(G20) 화상 정상회의에서 "치료제와 백신의 빠른 개발에 더해 공평한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올 4월26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선 "자국 사정이 급해지자 국경 봉쇄와 백신 수급 통제, 사재기 등으로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다"고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누구 들으라고 한 소리인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곽인찬의 특급논설] 백신 특허 유예? 쉽지 않다에 한 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백신 특허 유예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사진=뉴스1


◇왜 빌 게이츠는 반대할까

화이자 같은 메이저 제약사들이 특허 유예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논리도 정연하다. 이런 식으로 특허를 깔아뭉개는 것은 향후 혁신의 싹마저 자르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하긴, 특허를 보장 받지 못하면 어떤 제약사가 큰 돈 들여서 신약을 개발하겠는가. 코로나 백신 개발에 공적자금이 들어간 것은 맞다. 하지만 민간 자본도 같이 들어갔다. 그러니 특허 유예가 혁신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이 어거지는 아니다.

뜻밖에 반대 목소리를 낸 사람 중엔 억만장자 박애주의자 빌 게이츠가 있다. 게이츠는 자선재단을 통해 백신 개발에 헌신해온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특허 유예는 백신격차 해소의 해법이 아니라는 취지로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안전성이다. 백신은 첨단 기술력이 필수다. 특허를 푼다고 아무나 백신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혈전 부작용 등 안전성을 두고 말이 많다. 만약 복제 백신에서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면 누가 책임지나? 게이츠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곽인찬의 특급논설] 백신 특허 유예? 쉽지 않다에 한 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하루 앞둔 28일(현지시간)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연방 상·하원 합동회의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백신 무기고가 되겠다"고 말했다. /사진=뉴시스


◇과연 특허가 정지될까?

바이든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미국이 2차 대전에서 민주주의의 무기고였던 것처럼 다른 국가들의 백신 무기고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날 미국은 인도에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원료 2000만회분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동맹국에 무기를 나눠줄 순 있지만 미국이 무기 만드는 비법을 선뜻 공개하길 바라는 건 무리다.

미국은 백신 패권을 잡았다. 화이자, 모더나, 얀센(존슨앤존슨), 노바백스가 미국 제품이다. 중국, 러시아도 자체 백신을 생산하지만 미국산보다 한 수 아래 평가를 받는다. 영국이 개발한 AZ 백신은 종종 부작용 논란에 휩싸인다. 이처럼 미국이 꽉 잡은 시장을 바이든 대통령이 쉽게 놓을 것 같진 않다. 적어도 자국 접종률이 100%에 이르기 전까진 미국이 특허 유예에 동의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게 상식적이다.

진보적인 뉴욕타임스지는 '세계는 더 많은 코로나 백신을 필요로 한다'는 제목의 사설(4월24일)에서 아스트라제네카, 얀센 백신의 안전성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자나라의 사치"라고 말했다. 이어 바이든 행정부에 5가지를 제안했다. 사재기 중단, 특허 정지, 기술과 자원 공유, 생산능력 확충, 대안기술 투자가 그것이다. 인류애를 중시하는 진보의 목소리답다.

만약 바이든 대통령이 뉴욕타임스의 충고에 따라 제약업계 반발을 무릅쓰고 특허 유예에 동의한다면 노벨평화상 감이다.

[곽인찬의 특급논설] 백신 특허 유예? 쉽지 않다에 한 표
SK바이오사이언스는 국산 코로나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진은 경북 안동에 있는 SK바이오사이언스 백신 공장./사진=뉴시스


◇한국 제약업계 득실은

특허 유예는 한국에 득일까 실일까? 이미 SK바이오사이언스 같은 제약사들은 아스트라제네카·노바백스 등 메이저 업체와 백신 위탁 생산 계약을 맺었다. 한국이 미국 같은 백신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백신 가난뱅이도 아니다. 접종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전 국민이 맞을 양은 다 확보했다.

나아가 SK바사는 한창 국산 백신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내년 상반기 개발 완료가 목표다.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가 신속하게 진행된다면, 이르면 내년 안에 국산 백신을 맞을 수도 있다. 지금 백신 강국은 아니지만 잠재력은 충분하다. SK바사 관계자는 만약 백신 특허가 유예될 경우 "국내 백신 개발 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걱정한다. 지금이야말로 국산 백신에 대한 정부의 의지와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더 넓게 보면 백신 특허 유예는 제약 강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국가 정책과도 충돌한다. 정부는 바이오산업을 반도체를 이을 전략산업으로 육성 중이다. 이 마당에 우리가 남아공·인도의 주장에 선뜻 동조하기는 쉽지 않다.

나라마다 백신 특허 유예를 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야 온 인류가 코로나 퇴치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길 바란다. 부자나라가 양보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세상 일이 선의만으로 굴러가는 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은 아프지만 백신 특허 유예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데 한 표를 건다.

[곽인찬의 특급논설] 백신 특허 유예? 쉽지 않다에 한 표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