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미·중 "백신 줄테니 내편에 서달라" 무기가 된 백신 [글로벌 리포트]

정지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5.02 17:40

수정 2021.05.02 17:40

코로나시대 '백신패권' 전쟁
美, 각국에 대가교환식 지원
日에 1억회분 추가공급… 中 견제 손잡고
한국엔 반도체 투자 직접적으로 요구
中, 자국 영향력 강화에 적극 이용
개도국에 대량 공급하면서 '일대일로' 동참 요구
미·중
【파이낸셜뉴스 베이징=정지우 특파원】 코로나19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된 백신이 글로벌 패권 장악을 위한 무기로 변질되고 있다. 백신은 공공재라고 이구동성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백신을 공급하지 않는다.

여기다 백신 경쟁국을 의식해 자국 백신의 세계 장악력 확대에만 열을 올린다. 때로는 상대국 백신에 대한 효능과 공급정책 등을 비판하며 흠집을 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당초 주장했던 협력은 지켜질 수가 없다. 이미 말뿐인 약속이 됐다.
그러는 사이 인도를 비롯해 백신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는 세계 여러 국가에선 3차, 4차 코로나19가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 교역 사슬의 붕괴는 결국 자국에도 피해가 갈 수밖에 없지만 단기적인 이익에 매몰되고 있는 비판이 나온다.

■대가교환식 美 백신 지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취임 후 첫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미국이 다른 나라를 위한 백신의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신이 부족한 개발도상국 등에는 희소식이다. 세계 리더 국가인 미국의 효력이 검증된 백신이 공급되는 것은 자국도 코로나19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는 기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다만 미국의 지원은 '조건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등가교환까지는 아니더라도 백신을 공급받으려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됐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지난달 중순 화이자 백신을 추가로 구하기 위해 미국까지 날아가 바이든 대통령을 만났지만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 것은 백신뿐만이 아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 대만, 북한, 미얀마 등도 거론했다.

양국 정상은 이 자리에서 중국을 직접 지칭하며 중국이 규범 중심의 국제질서를 따르지 않는다고 공동 성명을 냈다. 또 동중국해에서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에 반대하고,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불법적인 해양 영유권 주장 및 활동을 비판했다. 아울러 홍콩과 신장위구르자치구 인권 상황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양국 정상은 중국의 핵심 이익인 대만도 언급했다. 양안(중국과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지만 미·일 정상 공동성명에서 '대만'이 언급된 것은 52년 만이다.

이 덕분에 스가 총리는 당초 미국과 계약한 1억440만회분에 1억회분 백신의 추가 공급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일본에 백신을 내주는 대신 반중국 전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던 일본의 태도 변화를 확실하게 이끌어낸 회담으로 평가됐다.

한국은 반도체다. 이달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일본처럼 한국에 백신을 내주는 대가로 미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세계적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미국은 주력산업인 자동차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삼성전자, 인텔 등 글로벌 기업 경영진과 화상 반도체대책회의를 갖고 미국 내 반도체 투자를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삼성전자는 20조원 규모의 미국 반도체 라인 증설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라인 증설은 경제적 효과나 산업 파급력, 일자리 창출 등에서 한국이 미국에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협상카드다. 중국 견제용 연합체인 쿼드(미·일·호주·인도)에 한국 합류를 요구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인도는 반대의 사례다. 미국이 자국 내 코로나 백신 비축분을 확대하기로 결정하면서 인도에 금수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해 '세계의 백신 공장'인 인도는 백신 수출은커녕 자국 내 백신 부족과 코로나19 확산으로 '생지옥'으로 변했다. 미국은 세계적 비판이 고조된 이후 뒤늦게 지원에 나섰지만 속내가 깔려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인도 지원에 부정적인 미국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인도주의가 아닌 지정학적 논리가 작용한 것이라는 것이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우리는 인도와 포괄적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있지만 정치적 보답에 대한 대가나 거래로 (인도인들의) 팔에 주사를 놓는 것에 관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주장했다.

■일대일로 등 영향력 강화 中 백신

미국과 백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공재인 백신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중국 역시 백신 하나만 놓고 협상을 진행하지는 않는다.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핵심 정책인 일대일로(육·해상 신실크로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백신 공급과 함께 논의해 왔다.

왕이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지난달 27일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 5개국 외교장관과 영상회의에서도 같은 행보를 보였다. 왕 부장은 이 자리에서 "6개국은 좋은 이웃이자, 동반자"라며 "이들 국가들에 안정적인 백신공급을 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역 협력과 관련해 역병 대항 공감대 연대 공고화, 역병 대항 실무협력 심화 등을 제안했다. 또 5개국과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긴급물자 비축고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일대일로 건설 가속화도 주문했다. 역병 후 경제회복 촉진, 각국 발전에 유리한 국제 및 지역 환경 유지 등을 제시하면서 일대일로를 그 중심으로 꼽은 것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참여 5개국 외무장관은 중국 측의 제안을 적극 지지하고 중국과 일대일로 건설을 지속 추진하기를 희망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이런 행보는 백신외교를 펼치는 대부분의 국가에 적용되고 있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를 보면 시 주석이나 왕 부장 등의 발언 내용에는 백신과 함께 일대일로가 들어가 있다.

반면 일대일로 탈퇴를 선언한 호주엔 "중국을 겨냥한 또 다른 도발적 행동이며 돌로 자기 발등을 찍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이 인도 내 코로나19 혼란을 틈타 인도 주변국들에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한다는 지적 역시 나온다. 중국은 미국 이외에 인도와도 백신경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인도는 자국 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코로나19 확산세로 더 이상 주변국들에 백신을 공급하지 못하는 상태다.

주요 외신은 이 같은 중국의 움직임은 중국과 백신외교 경쟁을 벌여온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타격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은 현재 80여개국과 3개 국제기구에 백신을 지원하고 40여개국에는 백신을 수출하고 있다. 세계에 제공한 중국산 백신은 누적 1억도스를 돌파했다.

하지만 중국산 백신을 공급받은 국가 상당수는 화이자 등 미국산 백신을 쓸 수 없는 저소득국가나 개도국에 집중돼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한국 등 방역 모범국가에서 중국산 백신을 사용하도록 다양한 전략을 쓰고 있다. 왕 부장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 회담 이후 중국 외교부와 관영매체는 한·중 건강코드 상호 인증체제 구축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성사될 경우 양국의 물적·인적 교류가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 요지다.
건강코드는 휴대폰을 이용해 코로나19 검사 결과, 백신 접종 여부, 위험 지역 방문 여부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상대적 방역 모범국가인 한국과 교류가 활성화되면 다른 국가에 중국산 백신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수 있고 내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도 담보될 수 있을 것이라는 등의 속내가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영국의 경제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중국의 '백신 외교'는 글로벌 위상 강화와 해당국과의 관계 증진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며 "향후 몇 년 내에 개도국에 대한 중국의 입지를 강화하게 될 것"으로 진단했다.

jjw@fnnews.com 정지우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