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인플레라는 흉측한 괴물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5.02 18:02

수정 2022.05.03 17:34

[곽인찬 칼럼] 인플레라는 흉측한 괴물
"아주 위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며, 적기에 수습하지 않으면 사회를 파멸시킬 수 있는 병폐다." 이 흉측한 괴물의 이름은 뭘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그 괴물에 인플레이션이란 딱지를 붙였다. 실제 사례로 러시아와 독일을 든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와 독일에서 있었던 초인플레이션 현상은 한 나라를 공산주의화하고 다른 나라를 나치즘 치하에 들게 하는 기반을 구축했다."('선택할 자유').

한동안 사라졌던 괴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계 경제가 고물가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떤다.
코로나 위기에서 벗어나려 돈을 왕창 푼 후유증이다. 흥청망청 돈을 쓸 땐 누구나 신이 난다. 그러다 중앙은행이 돈줄을 죄면 너나 없이 비명을 지른다. 그렇다고 괴물을 그냥 내버려둘 순 없는 노릇이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을 알코올중독자에 비유한다. 술꾼은 일단 자신이 중독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해도 치료를 원치 않는다. 당장 금주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다. 술꾼은 술독을 푼다며 이튿날 해장술을 또 마신다. 인플레이션도 마찬가지다. 돈줄을 조이면 당장 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높아진다. 이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효과도 일러야 1~2년 뒤에나 나타난다. 표 계산에 바쁜 정치인들은 물가 잡으려다 경제 망친다고 난리를 친다.

폴 볼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뚝심으로 반인플레이션 정책을 밀어붙였다. 1980년 3월 미국 소비자물가는 2차 오일쇼크 여파로 15%나 솟구쳤다. 볼커는 금리를 20%(1981년 6월)까지 끌어올렸다. 연준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 덕에 물가는 잡혔지만 경기침체를 피하지 못했다. 1980~1982년 기간 미국 실업률은 두자릿수를 웃돌았다. 고금리 부담에 짓눌린 농부들은 워싱턴DC 연준 빌딩 앞으로 트랙터를 몰고와서 시위를 벌였다. 볼커는 꿋꿋이 버텼다. 그에게 인플레이션 투사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고물가는 민심 이반을 부른다. 성장률이 떨어진다고 데모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물가가 오르면 사람들은 즉각 거리로 뛰쳐나간다. 그만큼 정치적으로 민감하다. 민생이 파탄 지경에 이른 스리랑카는 정권퇴진 운동에 불이 붙었다. 국내에서도 기름값이 뛰자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생존권 투쟁에 나섰다.

지난 3월 소비자물가는 전년동기에 비해 4.1% 올랐다. 10년여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아직 4%대라고 안심하다간 큰코다친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고 미온적인 사건이며, 자동으로 해소돼 다신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단언한다. 고물가는 암적인 존재다. 암과 싸울 때처럼 초기에 발견하고 적시에 치료하는 게 특효약이다.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을 국정비전으로 제시했다. 거창한 성장 프로젝트도 좋지만, 실제 지지율은 물가가 좌우할 공산이 크다. 물가는 매일 음식값 치를 때마다 피부에 와닿는다. 물가를 못 잡으면 다른 경제정책 아무리 잘해야 소용없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주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물가상승, 성장둔화가 모두 우려되지만 지금까지는 물가가 더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고물가는 오랜만에 닥친 난제다.
윤석열 당선인도 이 총재도 폭이 좁은 평균대 위에 섰다.

paulk@fnnews.com 곽인찬 주필
paulk@fnnews.com 곽인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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