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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확산이 소극적인 경찰 탓?'…7공수 강경진압이 사태 악화

뉴스1

입력 2022.05.15 11:01

수정 2022.05.15 11:01

1980년 5월전남도청을 장악한 계엄군.(5.18민주화운동기록관 영상 캡처)/뉴스1 © News1
1980년 5월전남도청을 장악한 계엄군.(5.18민주화운동기록관 영상 캡처)/뉴스1 © News1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하고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고(故) 안병하 치안감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 2018.5.10/뉴스1 © News1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하고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고(故) 안병하 치안감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 2018.5.10/뉴스1 © News1


1980년 5월 항쟁의 최후 결전이 벌어진 직후의 옛 전남도청 모습이 최초로 공개됐다. 노먼 소프 기자가 촬영한 5월27일 계엄군에 붙잡혀 오는 청년들. 뒷쪽 시계탑의 바늘이 오전 8시42분을 가르키고 있다.2021.5.6/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1980년 5월 항쟁의 최후 결전이 벌어진 직후의 옛 전남도청 모습이 최초로 공개됐다. 노먼 소프 기자가 촬영한 5월27일 계엄군에 붙잡혀 오는 청년들. 뒷쪽 시계탑의 바늘이 오전 8시42분을 가르키고 있다.2021.5.6/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2017년 11월22일 전남지방경찰청 1층 로비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강경진압을 거부한 故 안병하 경무관 추모 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전남지방경찰청 제공) 2017.11.22/뉴스1 © News1
2017년 11월22일 전남지방경찰청 1층 로비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강경진압을 거부한 故 안병하 경무관 추모 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전남지방경찰청 제공) 2017.11.22/뉴스1 © News1


[편집자주]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42년이 지났다.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한 시민 항쟁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재조명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1 광주전남본부는 오월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상하로 나눠 '경찰'과 '시민군'을 재조명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 "광주사태 초기에 경찰이 무력화되고 그로 인해 계엄군이 시위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 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

2017년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 담긴 내용이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 상황이 악화한 게 안병하 당시 전남 경찰국장의 책임이라고 단정했다.

이는 신군부 측과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비판없이 수용하는 보수 유튜버나 소위 태극기부대가 5·18을 왜곡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전씨의 주장처럼 경찰이 무력화되고 전남 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이 사태를 키웠을까.

경찰의 5·18 작전활동을 재조명한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은 15일 "경찰의 소극적인 진압작전이 사태를 키웠다는 신군부의 비난은 사실과 다르다"며 "공수부대의 투입과 잔혹한 진압행위가 광주시민의 공분을 일으켜 사태가 급격히 악화됐다"고 반박했다.

80년 5월 전남도경찰국이 작성한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사항'과 전남도경찰국 경비과의 'C.P(Command Post, 지휘부) 업무현황', 광주경찰서 상황처리기록부, 광주서부경찰서상황, 감사 자료, 광주사태교훈집 등을 종합분석한 결과다.

비상계엄은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인 1979년 10월27일 선포돼 81년 2월까지 계속됐다. 80년 5월16일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 비상계엄이 유지되다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내려졌다.

경찰은 평상시는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 소속으로 내무부장관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지만 계엄 상황에서는 군이 통제하는 계엄 조직의 일부로 편입된다.

전남도경찰국은 계엄 기간 31사단장의 지휘 통제에 따라 시위 진압 작전을 하게 돼 있었다. 하지만 80년 초부터 그해 5월17일까지 치안업무는 군이 아닌 경찰이 평소와 유사하게 수행했다.

5월17일 전까지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은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수칙 준수할 것, 최대한 교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차단할 것' 등 질서유지를 중점에 두고 지시를 내렸다.

도청 앞 집회가 본격화된 5월14일부터 16일까지도 경찰국장은 '시가지 운집 학생은 해산 지시에 불응 시 전원 연행' '학생에 대해 부상이나 희생자 없도록 최대한 노력' '극렬 행동 없도록 적절히 유도' '무위도식 양아치 일제 검거' '시민에게 겸손하므로써 불쾌감 주는 일 없도록 할 것' 등을 지시했다.

야간 시위 때도 '화학탄 사용 금지' '부상 사례 없도록 적극 유의' '해산 요령은 주력 부대를 분산시킬 것' '도주하는 학생은 추격하지 말고 그대로 놔둘 것' '주모자만 신속히 연행할 것' 등의 지시도 내렸다.

전남도경이 질서유지 위주에서 본격적인 진압작전으로 바뀐 건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이후로 추정된다. 7공수가 광주에 투입된 직후다.

이재의 연구위원은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사항'에서 경찰의 배치 상황을 31사단 작전과에 보고한 기록은 5월18일 아침 처음 발견된다"며 "17일 이전에는 경찰이 31사단에 시간대별로 작전상황을 보고한 흔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5월18일 아침 안병하 경찰국장은 시위진압 작전에 나선 경찰부대에 '학생의 부상, 피해가 없도록 유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날 정오부터는 '신속히 작전 전개 조속히 학생 연행 조치' '각 진압부대는 학생 연행 임무를 동시 수행할 것' '시위중인 학생은 철저히 검거할 것' 등 검거 연행으로 방침이 강화된다.

오후 3시32분 지시사항에는 '16:20부터 공수단이 투입돼 협동작전을 하게 되니 각 부대장은 현장 유지를 하고 가스차 피탈이나 인명피해가 없도록 조치 바람'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후 오후 8시30분 특별지시사항으로 야간에는 도청, 광주, 서부경찰서를 자체경비 실시, 계엄군 도착시는 광주서장이 합동작전에 임할 것이며 그때부터는 도청 경비 임무 담당할 것'을 끝으로 별다른 지시가 없다.

이 연구위원은 "7공수는 18일 오전 2시쯤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됐지만 경찰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오후 4시 7공수부대의 투입과 동시에 진압작전의 주도권이 공수부대에게로 넘어갔다"고 설명했다.

7공수의 시내 투입 후 작전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다. '부상 예방'에 중점을 둔 작전이 아니라 '대검 착검' 등 과감한 타격으로 부상이 속출하는 적극적인 폭동진압방식이었다.

실제로 18일 오후 4시까지 경찰이 연행한 학생은 58명이었다. 하지만 7공수가 시내에 투입된 후 19일 새벽까지 연행자 수는 356명으로 6배 가량 늘었다.

19일부터는 진압 작전의 양상이 더 달라진다.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직접 분산시키거나 체포 연행하고 경찰은 체포자 운송이나 시민 부상자 치료, 식사 제공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이 연구위원은 "전남경찰국이 작성한 작전상황일지를 보면 5·17 이전이나 5·18 이후 경찰의 상황 조치는 정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경찰 작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질서유지였고, 5·17 이전에는 학생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더라도 정면 충돌을 피해 평화로운 집회로 마무리지었다.

18일부터는 상부 지시에 따라 시위를 해산시키고 주동차 체포 작전으로 전환했지만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고 시위대를 자극하지 않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반면 7공수 33대대와 35대대의 진압작전은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7공수를 비롯한 공수부대는 광주진압작전을 '대간첩 작전'과 '충정작전'이라는 2가지를 병행해 실시했다.

광주에서의 시위를 '간첩들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예단했고 이 기준에 따라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간첩처럼 취급했다.

7공수 33·35대대가 광주시내에 투입되자마자 벌인 시위 진압 행태가 사태를 악화시킨 발단이라는 것이다.

정모 당시 31사단장은 1994년 검찰진술조서에서 "7공수는 처음부터 마치 적 후방지역에 은밀히 공수 낙하해 그곳에 있는 적 주민들에게 일격을 가해 단시간 내에 강압적인 수법으로 굴복시키고 동조시키기 위해 살상과 도살을 위주로 한 공비 토벌 작전을 하듯 광주시위를 진압했다"고 진술했다.

이 연구위원은 "18일 오후 4시경 7공수는 일반적인 폭동진압작전의 원칙마저 지키지 않은 채 금남로에 투입돼 시위학생은 물론 구경꾼마저 곤봉으로 후려치거나 착검한 상태에서 무장공비 토벌하듯 강력하게 진압작전을 펼쳤다"며 "이를 본 시민들이 경악했고 다음날 항의 시위에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31사단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이 연구위원은 "31사단은 경찰 작전의 통제 책임과 배속된 7공수여단의 작전도 통제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며 "18일 당시 광주 시내에는 시위 진압에 동원할 수 있는 경찰이 2000명 가까이 있었고 시위대 규모는 그 절반 정도인 1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31사단장은 경찰력만으로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나 거듭되는 상부의 공수부대 투입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육군본부 지휘부에 포진한 신군부측 인사들은 초동단계부터 무자비하고 강력한 진압작전을 전개해 시위 확산 여지를 조기에 없애려고 했다"고 말했다.


80년 당시 광주 현장 시위 진압의 일선 책임자였던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이 2017년 경찰청으로부터 '제1호 경찰영웅'으로 선정됐다.

1996년 검찰은 '12·12 및 5·18 사건' 1심 공소장에서 '공수부대의 투입과 잔혹한 진압행위가 광주시민의 공분을 일으켜 사태가 급격히 악화됐다'고 수사 결과를 밝혔다.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42년이 흘렀으나 '무기력한 경찰'과 '경찰국장의 과실' 때문이라는 전두환 회고록은 바뀌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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