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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기동타격대' 최후의 43인 '재조명'…"이름 주소 적어 주머니에"

5·18 '기동타격대' 최후의 43인 '재조명'…"이름 주소 적어 주머니에"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광주시민 총궐기대회 모습 © News1DB


5·18 '기동타격대' 최후의 43인 '재조명'…"이름 주소 적어 주머니에"
계엄군과 대치 중인 시민군 모습. © News1DB


5·18 '기동타격대' 최후의 43인 '재조명'…"이름 주소 적어 주머니에"
15월27일 계엄군에 붙잡혀 오는 청년들. 뒷쪽 시계탑의 바늘이 오전 8시42분을 가르키고 있다.© News1DB


[편집자주]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42년이 지났다.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한 시민 항쟁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재조명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1 광주전남본부는 오월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상하로 나눠 '경찰'과 '시민군'을 재조명한다.

(광주=뉴스1) 이수민 기자 = '우리는 계엄군으로부터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계엄군에게 훼손당한 질서를 회복해야 할 기동타격대로서 광주시민의 명예와 우리의 목숨을 걸고 다음을 준수한다.'

1980년 5월26일 오후 3시 광주 동구 전남도청 앞마당, 40여명의 젊은 '시민군'이 모였다. '기동타격대' 창설식. 한양대를 졸업한 후 광주에서 사업을 하던 서른세살의 부대장 이재호씨가 '기동타격대' 선서문을 낭독했다.

'하나.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해 시내 진입을 저지하고 끝까지 도청을 사수한다.'
'하나. 계엄군과 대치하거나 대항할 때는 절대 우리가 먼저 총을 발사하지 않는다.'
'하나. 싸움, 음주 등 난동자들을 체포해 본부에 이송한다.'
'하나. 본부에 이송된 자들은 적절히 조치하여 무고한 자들은 안전하게 귀가시킨다.'
'하나. 시민의 신고에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협력에 응한다.'
'하나. 모든 상황은 기동타격대 본부에 연락해 대처한다.'

기동타격대가 지켜야 할 6가지 원칙이 전남도청 앞마당에 울려퍼졌다. 죽음을 각오한 대원들이었지만 이들의 사기는 어느때보다 높아졌다.

기동타격대는 1980년 5월26일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을 목전에 둔 절체절명의 순간 도청을 사수하고 광주를 지키기 위해 결성한 '무장결사대'다.

5·18민주화운동의 진정한 주체로 투쟁을 선도했지만 지난 42년간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최근 이들에 대한 실체적 진실과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해현 초당대 교수는 15일 "기동타격대원들은 체포된 후 권력을 찬탈하려는 전두환의 의도에 따라 내란을 일으킨 세력으로 조작됐다"며 "이들의 목숨을 건 불굴의 항전 의식은 항쟁 주체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5·18이 역사적 평가를 받고 한국사에서 군부독재의 유물이 사라지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기동타격대의 전신…'5·18 시민군'과 '기동순찰대'

1980년 5월21일 오후 계엄군의 집단발포 등 만행에 분노한 광주시민은 그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시민군'이다.

시민군은 대학생과 초·중·고등학생, 청년, 재수생, 무직, 공무원 등 직업과 나이 구분없이 구성했다.

계엄군이 철수한 도청은 항쟁의 지휘본부가 됐고 조직체계가 갖춰지지 않아 중흥동 예비군 부중대장 출신의 박남선 주도로 운영됐다.

5월24일 발간된 투사회보 7호에는 '신고하지 않은 무기 소지자는 시민군의 무기 회수에 반드시 따르라'는 구절이 담겼다. 이는 '시민군'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표기된 첫 사례다.

이후 광주 시내 질서 유지와 계엄군 진입을 감시할 순찰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시민군 내부에서 지프, 트럭 등 차량을 타고 다니는 '기동순찰대'가 편성됐다.

순찰대는 당시 시위대 중 하나였던 이관택의 제안으로 24일 처음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역시 공식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집단으로 순찰대 역할을 하면서도 자신이 '순찰대' 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순찰대는 지프, 트럭, 마이크로버스 등 차량 7~8대 정도로 운용하며 공권력이 붕괴된 광주의 치안을 담당했다. 이들은 양림동, 운암동, 풍향동, 양동 등 광주 주요 거점을 밤마다 지켰다.

또 계엄군의 집중사격에 대비해 차량 밖을 타이어로 빙 두르고 안에 철판을 대는 등 방호 작업도 했다.

특히 순찰대는 지원동 부근과 운암동에서 계엄군과 실제 총격전을 하는 등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 "끝까지 도청 사수"…40여명의 '기동타격대' 편성

5월26일 당시 도청 항쟁 지휘부 중 하나인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도청을 사수하자는 파와 계엄군에게 무기를 내놓고 협상하자는 온건파로 나눠져 갈등을 빚고 있었다.

주도권을 먼저 장악한 온건파는 무기를 회수하는 등 협상을 주도했다. 그러나 도청 상황실장을 하고있던 박남선이 천장에 권총을 쏴 분위기를 장악하면서 협상을 주장하는 파를 도청에서 몰아냈다.

현역으로 군대를 마치고 한양대 공대를 졸업한 엘리트 전사 이재호와 김종배 위원장, 정상용 내무부장, 박남선 상황실장 등 강경파를 중심으로 계엄군과 최후까지 일전을 전개할 새로운 전투조직 '기동타격대'가 결성됐다.

이재호는 시민수습위원회와의 상의를 통해 기동타격대의 구체적인 편성계획을 수립했다. '대장-조장-조원'의 편제로 대장은 리더십이 있는 윤석루가 추천됐다.

지도부는 부대 편성 사실을 공지하고 지원자를 받았다. 이들은 "기동타격대는 도청을 사수하려는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 임을 알리고 가족이 있거나 어린 학생은 편성에서 제외했다.

고아원 출신의 중식당 종업원 이정태부터 DJ로 일한 박인수, 나전칠기공 김공휴 등 약 40인이 타격대원이 됐다.

숭의중학교를 중퇴한 15세 안용순이 막내였다. 지도부는 타격대에 미성년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지만 안용순은 광주를 지키고자 목숨을 내던지겠다고 각오했다.

기동타격대 창설식은 같은날 오후 3시 도청 앞마당에서 이뤄졌다. 대장 윤석루가 대원들을 바라보고 이재호가 대원들을 대표해 선서문을 읽었다.

타격대는 대원증을 발급받았고 옷도 전원 전투경찰복에 방석모를 썼다. 전사했을 때를 대비해 신원확인을 위한 이름과 집주소, 연락처 등을 적어 호주머니에 담았다.

타격대는 각 조당 5~6명씩 7조로 구성됐다. 1~6조는 구역을 나눠 순찰을 했고 7조는 병력 수송을 담당했다.

순찰조는 각각 Δ1조 지원동, 방림동 Δ2조 교도소 Δ3조 백운동, 지원동, 상무대 Δ4조 도청, 장동, 산수동, 산수5거리 등 Δ5조 금남로, 터미널, 농성동, 도청 Δ6조 광주공원, 대인동, 도청을 맡았다.

◇ 3시간의 전투…장렬한 최후와 체포, 고문과 가짜 혐의

기동타격대는 26일 오후 3시 창설된 후 약 15시간 만인 27일 오전 6시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27일 오전 3시 계엄군이 도청을 기습 공격하면서 약 3시간만에 대원들은 사살되거나 체포됐다.

2조와 5조, 7조는 기습으로 전투조차 해보지 못한 채 대부분 체포됐다.

3조는 화단 근처서 경비를 서던 중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운전병과 조장 등 3명이 전사했다.

4조는 자정넘어 동태 파악에 나섰다가 노동청 앞에서 계엄군과 조우, 도청으로 달려와 직접적으로 총격전을 벌였다.

공소장 등으로 확인된 기동타격대는 43명이다. 이 중 3명은 도청에서 사살됐고 3명은 행방불명됐다. 나머지는 계엄군에 의해 체포, 연행됐다.

체포 후에는 모진 고문과 재판이 계속됐다. 체포된 이들 대부분에게 내란죄가 적용됐다. 불과 10여시간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한 이들에게는 과한 처분이었다.

악한 간첩의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한 가짜 혐의 추가도 계속됐다.

4조 소속 김공휴씨(62)는 체포 후 삐삐선(야전전화선)에 두 손을 묶인 채 버스에 실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방화, 탈취, 강도, 강간 등 가짜 혐의가 덧씌워졌다.

야구 방망이로 맞아 몇 번을 쓰러지고 혼절하면서도 가짜 혐의를 인정하지 않자 군인들은 '개미 고문'을 했다.

상무대 울타리에 있던 포플러 나무에 군용 사각팬티만 입힌 채 발을 묶고 뒤로 수갑을 채워 나무에 묶은 뒤 수사관들이 개미굴을 지휘봉으로 들쑤셨다.

왕개미 수천 마리가 김씨의 코와 귀, 입으로 들어가 스멀스멀 기어 다녔고 결국 모든 혐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광주교도소로 이감됐다가 5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같은 해 10월30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러나 전과와 폭도 누명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으며 고문과 구타의 후유증으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다.

박해현 교수는 "계엄군에 맞선 시민의 항쟁은 최초 '시민군', '기동순찰대'를 거쳐 '기동타격대 결성'으로 발전했다"며 "소홀히 취급돼 역사적 평가는 커녕 실체 파악이 되지 않은 타격대에 대한 관심과 정체성 형성은 앞으로의 100년을 위해 남은 과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