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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겸손과 건망증

정인홍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6.09 18:38

수정 2022.06.09 18:38

[강남시선] 겸손과 건망증
"더불어민주당이 2년 전(2020년 4월) 21대 총선에서 180석을 차지했지만, 협치 없는 오만과 독선을 앞세워 입법독주를 하다 결국 올해 3·9 대선과 6·1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우리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집권여당인 국민의힘 소속 한 다선급 중진 의원이 최근 사석에서 한 말이다. 한마디로 이겼다고 자만 떨다간 '한 방'에 갈 수 있다는 얘기다.

국민의힘은 파죽지세다. 지난해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이어 올 대선과 지방선거까지 내리 3연승을 했다.
광역단체장 17곳 중 호남과 제주를 뺀 12곳을 싹쓸이했다. 민주당이 14곳에서 압승한 4년 전과는 완전 딴판이다. 국민의힘은 불과 4~5년 만에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을 한꺼번에 되찾았다.

결코 국민의힘이 잘해서가 아니다. 민주당이 못해서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사실 민주당도 처음엔 안 그랬다. 민주당은 2년 전 2020년 4·15 21대 총선에서 180석을 거머쥐었다. 당시 이해찬 대표는 "선거 승리의 기쁨에 앞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연일 겸손과 자제를 주문했다. 2004년 17대 국회 때 과반의석을 얻고도 오만으로 자멸했던 열린우리당의 트라우마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겸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적인 국정운영 뒷받침'으로 포장된 오만함은 갈수록 도를 넘었다. 원내 1당의 힘의 논리를 앞세워 각종 법안과 정책을 밀어붙였다. 18개 국회 상임위원장도 독식했다. 비판 여론은 안중에 없었고,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생산적 협치는 실종됐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2일 최고위원회를 주재하고 "국민께서 여당에 몰아준 강한 지지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두려운 성적"이라며 "겸손한 자세로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고 했다. 바로 2년 전 180석 슈퍼여당이 됐을 때 민주당이 한 말이다.

20대 총선 직전인 2015년 말, 박근혜 정부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은 '180석 이상 확보'를 호언장담했다가 이듬해 총선에서 져 민주당에 원내 1당 자리를 내줬다. 이후 박 대통령 탄핵과 대선, 지방선거, 총선까지 내리 작살났다. 모두 집권당의 오만함이 빚은 결과였다.

무릇 자만은 자멸을 부르기 마련이다. 아무리 건망증이 심한 곳이 정치권이라지만, 오만과 독선을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다른 모든 과학은 진보하는데 정치만은 삼사천년 전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일갈했다.

이해찬 대표는 180석을 거머쥔 21대 총선 직후 당선인 전원에게 편지를 썼다.
내용은 "우리는 (열린우리당 시절) 승리에 취했고, 과반의석을 과신해 겸손하지 못했다. 일의 선후와 경중, 완급을 따지지 않고 나 자신을 내세웠다"는 자기반성이었다.
딱 지금 국민의힘에 필요한 말이다.

haeneni@fnnews.com 정인홍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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