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2일 동안의 유럽 출장을 마치고 오는 18일 귀국하면서 출장 성과에 관심이 모인다. 이 부회장은 매주 출석해야 하는 재판을 2주나 미뤘을 정도로 이번 출장을 중요하게 봤다. 출장의 핵심 목적 중 하나는 극자외선(EUV) 장비 확보다.
이 부회장은 지난 14일(현지시간)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면담을 갖고 반도체 산업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번 유럽 출장에서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뤼터 총리를 비롯한 네덜란드 인사들과의 만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뤼터 총리와의 면담에서 노광 장비 기업인 ASML의 극자외선(EUV) 장비 공급과 관련해 네덜란드의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이 부회장은 네덜란드의 ASML 본사도 방문해 경영진과 면담을 갖고 EUV 장비의 원활한 수급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지난 2020년 10월에도 ASML 본사를 찾아간 바 있다.
EUV 장비는 반도체 제조 공정 중 하나인 '노광(露光)' 공정에 쓰이는 장비다. 노광 공정이란 빛을 이용해 반도체 웨이퍼 위에 회로 모양을 새기는 작업이다. 그 모양대로 웨이퍼를 깎아내면 반도체 집적회로가 된다. 반도체의 밑그림을 그려주는 작업인 셈이다. 회로를 미세하게 그릴수록 반도체의 성능도 높아져 섬세한 공정이 필요하다. 반도체 8대 제조공정 중 노광은 전체 생산시간의 절반 이상, 비용은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공정이다.
이 공정에서 극자외선을 사용하는 게 EUV 장비다. 극자외선 파장 광원은 기존에 쓰이던 불화아르곤 광원보다 파장의 길이가 10분의 1 미만으로 짧아 더욱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다. 특히 7나노미터(nm) 이하의 초미세 공정을 구현하려면 EUV 장비를 필수로 사용해야 한다. 반도체 제조기업은 이를 통해 급증하는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고성능 저전력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
ASML은 이 EUV 장비를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회사다. 극자외선은 빛의 파장이 짧아 공기에 쉽게 흡수되는 만큼 가동되는 장비의 내부를 진공 상태로 만들어야 하고, 나노 단위로 빛의 패턴을 그려야 하기에 관성을 무시하는 수준의 기계적 움직임도 구현해야 하는 등 기술 난이도가 매우 높아서다. 캐논·니콘 등 노광 장비 경쟁사들은 아직 이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다.
EUV 장비의 수요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지만 연간 50대 정도만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비 한 대가 집채만한 크기이며, 수백개의 업체에서 부품을 받아 장비를 조립하기에 생산을 늘리는 데 물리적인 한계가 있어서다. 초미세 공정으로 반도체를 생산하려는 기업은 많지만 장비 공급은 제한되다보니 대당 가격이 3000억원에 달하는데도 구매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이 부회장뿐만 아니라 펫 갤싱어 인텔 CEO도 올해 초 ASML에 직접 연락해 장비 수급 방안을 논의했으며 대만의 TSMC도 ASML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여기에 SK하이닉스와 미국의 마이크론도 ASML의 주요 고객으로 부상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전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 대다수가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ASML이 장비를 납품하는 기업임에도 '슈퍼 을'로 불리는 이유다.
삼성전자의 주력 반도체 사업은 D램이며 앞으로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을 강화한다는 청사진을 세웠다. 현재 반도체 업계에서 EUV 장비는 D램과 파운드리 공정에 집중적으로 사용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경쟁력 확보의 성패는 EUV 장비를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는 셈이다. 유안타증권에 따르면 올해 예상되는 EUV 장비의 출하량은 51대이며 이 중 삼성전자와 TSMC가 각각 22대와 18대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EUV 장비는 기업 총수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관심사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뤼터 총리와의 화상 정상회담에서 ASML의 한국 투자에 대해 언급했으며 윤석열 대통령도 당선인 신분이었던 지난 3월 뤼터 총리에게 반도체 협력을 제안하는 등 정권과 관계없이 ASML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중국과 반도체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 정부도 동맹국의 반도체 기술이 중국에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데, 특히 중국에 EUV 장비가 반입되는지 여부를 주시하는 등 견제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EUV 장비를 얼마나 확보하는지에 따라 향후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서의 입지가 달라질 것"이라며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필요한 만큼 확보할 수 없기에 이 부회장 등 주요 반도체 기업 총수들이 직접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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