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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영끌족’ 걱정을 왜 하느냐고요?

[기자수첩] ‘영끌족’ 걱정을 왜 하느냐고요?
바야흐로 갈등의 시대다. 삶에 여유가 없어지면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갈등이 생긴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3고 시대가 열리면서 팍팍한 경제 사정을 바탕으로 한 갈등을 매일 목격하고 있다. 금리인상으로 인한 빚 부담 가중 소식에 빚 있는 사람과 빚 없는 사람이 나뉘어 싸운다. 금리인상이라는 현상은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있는 탓에, 비교적 높은 관심을 받는 '영끌족'을 몰아세운다.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영끌'과 '빚투'는 일종의 추세였다. 유동성이 넘쳐흐르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빚을 냈다. 대출받기가 쉬웠을뿐더러 당장 빚을 내더라도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이익이라는 생각이 사회에 만연했다. 다만 거품이 빠른 속도로 걷혔고 유동성 파티가 남긴 계산서는 예상보다 훨씬 가혹했다. 물고 물리는 빚의 고리 속에서 누군가는 '3고'에 돈맥경화까지 겹친 최악의 상황을 하루아침에 받아들여야 했다. 어떤 개인의 흐려진 판단력만이 원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었다.

에피소드 속 '영끌족'은 책임을 부정한 적도, 빚을 대신 갚아 달라고 한 적도 없다. 언제까지 버텨야 하느냐는, 어렵다는 푸념 정도였다. 이는 지금 대다수가 함께 겪고 있는 경제 불확실성에 대한 고민이다. 빚이 많은 만큼 받아들이는 무게가 크고, 극단의 사례로서 많이 언급됐을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미 큰 부담을 안고 있을 '영끌족'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잘못된 정책 방향성 때문이다. 경기 변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거지'가 된 사람과 위험을 알면서도 제 눈을 가렸던 사람을 정책이 가려내고 있지 못한 탓이다. 자칫 '영끌족' 동정 여론이 확산되면 공적자금을 들여 '투기꾼'을 도울까봐 이들의 잘못을 탓하고 동정 여론을 끊어내려 한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 밥그릇을 빼앗기기 싫었던 아우성이 상대에 대한 비난과 비판으로 발현된다.

'영끌족'은 실체가 없다. 한 단어 안에 다양한 시나리오가 함축된다. 때문에 그 자체로 잘잘못을 가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회현상이 맞물려 전에 없는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만큼 취약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필요하다. 이때 도와야 하는 대상에 대한 뾰족한 정의가 마련돼야 한다. 그간 정책이 저마다의 취약층을 지원했던 탓에 포괄적인 개념이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seung@fnnews.com 이승연 금융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