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삶] 한비야 "천원이면 한 생명 살리는데…너무 분했다"

연합뉴스

입력 2022.12.01 06:00

수정 2023.01.02 10:36

"내 돈으로 현장서 직접 돕는 '내돈 직도' 사업 계획" "즐겁고 자유롭게 기왕이면 남 도와주며 살고 싶다"
[삶] 한비야 "천원이면 한 생명 살리는데…너무 분했다"
"내 돈으로 현장서 직접 돕는 '내돈 직도' 사업 계획"
"즐겁고 자유롭게 기왕이면 남 도와주며 살고 싶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 한비야(64)는 가슴만 뜨거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발과 손도 뜨거워 곧바로 실천한다.

그는 30대 초반이었던 1993년부터 6년간의 오지 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의 참상을 목격한 뒤 2001년부터 20여 년간 국제 구호 활동에 나섰다.

지난달 25일 서울 덕수궁 근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에서 오지 여행을 하면서 1천 원짜리 링거 1병이면 아이를 살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고 국제구호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올해 2월 현장 구호 활동을 종료했다.
2025년에는 대학강의도 그만둠으로써 자발적 은퇴를 완료한다고 했다.

앞으로 현장을 방문해 내 돈으로 직접 돕는 '내돈 직도'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글쓰기도 계속할 예정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6년 만에 홍익대 영문과에 들어갔던 그는 미국 유타대 언론대학원에서 국제홍보학을 전공했다. 그는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냈다. 현재 이화여대 초빙교수로서 학부와 대학원에서 인도적 지원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2009년 남수단 기근 현장에서의 한비야 [본인 제공]
2009년 남수단 기근 현장에서의 한비야 [본인 제공]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조선일보,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를 지냈다. 아버지를 태워 가기 위한 회사 지프차가 집 앞으로 오곤 했다. 고향이 북한이었던 아버지는 홀로 고생했던 기억 때문인지, 길거리에서 거지 아이를 보면 집에 데려와서 씻기고 먹이고 입히곤 했다. 아버지는 필화사건에 연루돼 당국에 붙잡혔으며 이를 계기로 KBS로 옮겼다가 49세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 중학교 생물 교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하신 후에는 전업주부였다.

-- 어릴 때 가정은 부유했나.

▲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리 집에 전화기가 있었다. 동네의 가정에 전할 소식들이 우리 집 전화로 몰려왔다. 애를 낳았다, 누가 돌아가셨다, 학교에 합격했다는 등의 소식이 들어오면 나는 집집이 찾아다니며 전했다. 언니들은 숫기가 없었으니 내가 나름대로 마을의 NGO(비정부기구) 활동을 했다. 전화 심부름을 하면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집에 가보면 엄마는 아파서 누워 있고, 아기는 울고 있으며, 남편은 술 취해 있기도 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계는 어떻게 유지됐나.

▲ 살림살이가 어려웠다. 아버지의 친척뻘 되는 분이 등록금을 대주셨다. 당시에는 아무리 부자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로 고마웠다. 다른 한편으로 어린 나이에 등록금을 받으러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적절할 때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민망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사람들이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를 알게 됐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 구호 현장에서 활동 중인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2002년 아프가니스탄 구호 현장에서 활동 중인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 중고교 시절 성적은 어떠했나.

▲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성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어머니가 기뻐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문제집도 공짜로 주시기도 했다.

-- 고교 시절 활동은 어떠했나.

▲ 내가 다니던 숭의여고의 농구부가 유명했는데, 나는 응원단에 들어갔다. 과거에 웅변을 했으니 목소리가 크고,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인 것 같다.

-- 고교 졸업 후 바로 대학교에 갔나.

▲ 대학 시험에서 떨어진데다 등록금도 없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아도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오기도 작동했다. 나는 서울역 앞 다방 DJ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

-- 아르바이트 생활은 평탄했나.

▲ 고졸의 설움이 많았다. 사람들은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얼굴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재취 자리나 가라"는 등의 막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나를 부르는 호칭도 '한비야 씨'가 아닌 '야'였다. 임시 공무원으로 일할 때는 직속 상사가 검은색 장부로 나의 어깨를 내리치기도 했다. 고졸이라는 이유로 임금이 절반밖에 안 됐고 이마저도 떼어먹는 업체가 적지 않았다. 나는 그 돈이 절실히 필요한데,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 대학은 뒤늦게 왜 들어갔나.

▲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6년 만에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안 가면 말(주장)도 제대로 못 하는, 힘없는 사람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학력고사를 치렀는데, 점수가 잘 나왔다. 서울대에 가려 했다가 포기했다. 홍익대에 전액 장학금과 함께 매달 생활비를 주는 파격적인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 독서를 많이 하나.

▲ 1년에 평균 100권 정도 읽는다. 고등학교 때 1년에 100권 읽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하고 있다. 어렵지 않다. 1주일에 2권 정도 읽으면 된다. 나는 구호 현장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시간에 독서를 한다. 한국에서는 자동차가 없어서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나에게는 책을 읽는 시간이다. 소설, 시집 등을 읽고 세계사를 특히 좋아한다.

-- 독서의 장점은 무엇인가.

▲ 남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 장점이다. 요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보는 것은 문제다. 자체 추천 알고리즘 때문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위험한 일이다. 내가 어릴 때 마을에서 전화 심부름을 다니지 않고 집안에만 있었다면 세상이 모두 우리 집과 똑같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서로 악을 쓰고 싸우는 집도 있고, 가난하지만 화목한 집안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 일기는 매일 쓰나.

▲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 쓰기를 멈춘 적이 없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일기를 깊게 쓰게 됐다. 누구한테 말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일기를 썼던 것 같다. 이제는 그 일기장들 나의 재산 중 최고가 됐다.

--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무엇인가.

▲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많이 경험하는 것을 추가하고 싶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체계화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한비야가 펴낸 에세이집 표지 (출처=연합뉴스)
한비야가 펴낸 에세이집 표지 (출처=연합뉴스)

-- 등산을 좋아한다던데.

▲ 초등학교 이전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에 갔다. 큰 언니와 작은 언니는 발레, 한국무용을 배웠다. 나는 산이 좋았다. 산에 가서 칭찬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어른 등산객들이 꼬마가 산에 온 것을 보고 "장하다", "기특하다"라고 하면서 먹을 것도 줬다. 나는 언니들과 달리 얼굴이 예쁘다는 소리를 못 듣는 편이었는데, 산에서는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1주일에 2~3번은 산에 간다. 외국에 갔다가 한국에 도착하면 바로 산에 오른다. 나는 가끔 암벽 등반도 한다.

-- 등산 외에 건강관리를 위해 하는 것은 무엇인가.

▲ 매일 아침 1시간씩 요가를 한다. 내가 직접 만든 요가가 있다. 술은 좋아하지만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취한 적이 2~3번 정도다. 잠은 새벽 2시께 자고 6∼7시 정도에 일어난다. 아주 깊게 자는데 5시간 정도의 수면으로 충분하다.

-- 본인의 성격은 어떠한가.

▲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이다. 말이 빠른 것은 나의 가장 큰 콤플렉스다. 어릴 때부터 혼나는 이유의 90%가 빠른 말이었다. 말을 천천히 하라,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하냐, 덤벙대지 마라와 같은 지적을 많이 받았다. 고치려고 노력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다음부터는 발음을 분명히 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긴급구호 현장에서 언론사와 인터뷰할 때 말을 빨리하면 긴박감이 전달돼 도움이 된다.

2004년 인도양 쓰나미 현장에서의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2004년 인도양 쓰나미 현장에서의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 어떻게 국제 구호 활동을 하게 됐나.

▲ 오지 여행을 하다 여러 참상을 보게 됐다. 아프리카에 여행을 갔는데, 아이들이 온종일 나를 쫓아다녔다. 동양인이라서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의 손에 꽃반지와 시계를 그려주면서 함께 놀았다. 사진 찍을 때 혓바닥을 내미는 아이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다른 곳에 갔다가 며칠 후에 그 마을에 들렀는데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은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마을에 급성 설사가 돌아 아이들 몇 명이 갑자기 숨졌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배부르게 먹지 못한 아이들이 설사하다 죽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링거 한 병이면 치료가 가능한데, 구하지 못했다. 죽어야 할 목숨이 아닌데, 너무 분했다. 링거 1명은 1달러 정도다. 한국 돈으로 1천원 조금 넘는 수준이다.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서는 아이들과 놀았는데, 지뢰를 밟아서 발 하나가 없어 목발을 짚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내가 난민촌을 떠날 때 그 아이가 빵을 건넸다. 놀아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뭐라도 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난민촌에서 빵은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소중한 식량이다. 나는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난민구호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귀국 후 때마침 월드비전에서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다.

-- 구호를 위해 몇 개국에 갔나.

▲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지만 20년간 20개국은 되는 것 같다. 첫 번째가 아프가니스탄이었고 이어 이라크, 파키스탄의 순으로 갔다.

2013년 필리핀 태풍 임시 난민수용소 학교에서 아이들과 얘기하는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2013년 필리핀 태풍 임시 난민수용소 학교에서 아이들과 얘기하는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 구호 활동이 위험하지는 않나.

▲ 지진 현장이 특히 위험하다. 여진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파키스탄 산 중턱에 텐트를 치고 있었는데, 추가로 산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직원들한테 여권을 주머니 안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우리가 매몰돼 숨졌을 때 빨리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조치였다. 구조대원들이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이미 죽은 활동가들의 신원을 확인하느라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현장 활동은 이제 그만하는가.

▲ 올해 1월과 2월 남수단에서 파견 근무를 한 것이 직함을 갖고 하는 현장 구호 활동의 마지막이다. 더는 현장 활동을 하지 않는다. 나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이 많다. 이제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현장에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성공 경험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 북한 구호 사안이 발생하면 갈 생각이 있나.

▲ 당연하다. 북한에 가서 구호하는 것은 모든 국제활동가의 소망이다. 지난 20년간 북한에 홍수도 나고, 가뭄도 나고 해서 국제구호팀이 반드시 출동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편도 북한 구호 활동을 강력히 원한다. 국제 긴급구호는 재난 발생지가 어느나라든 상관없이 생명을 살리는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이 대원칙이다. 정부나 국가의 이념과는 상관없이 재난을 당한 일반 주민을 위한 것이다.

1997년 베트남 메콩강 여행중인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1997년 베트남 메콩강 여행중인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 구호 활동은 여행에서 비롯된 것인데, 왜 여행을 좋아하게 됐나.

▲ 집에 지도가 많았다. 어머니가 지구본뿐 아니라 지도가 그려져 있는 테이블, 샤워 커튼, 옷 등 생활용품을 사 오시곤 했다. 내 머리에는 세계지도가 들어 있었다. 우리나라는 베이스캠프이고 무대는 전 세계라고 생각했다.

-- 왜 오지여행을 선택했나.

▲ 나는 5년 8개월 동안 40여 개국을 찾아갔다. 오지 여행을 선택한 것은 편한 여행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것에 기뻐하고, 어떤 것을 슬퍼하는지 알고 싶었다. 지금 내 다리에 힘이 있을 때 오지에 다니고 싶었다. 오지 여행을 포함해 지금까지 내가 방문한 나라는 모두 104개국이다.

-- 여행은 왜 혼자 다니나.

▲ 같이 갈 사람이 없었다. 여행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고, 돈을 다 털어서 가야 하며, 직장도 포기해야 하니 같이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여행에서는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게 자산인데, 두 명이 같이 가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 혼자 여행하면 무섭지 않나.

▲ 무서운 줄을 모르고 간다. 정확한 여행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위험한 줄 미리 알면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도 여행인데, 왜 위험한 곳으로 일부러 가려고 하겠는가.

-- 외국어 실력은 괜찮나.

▲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를 한다. 현지에서는 이런 언어가 안 통할 때가 많다. 그림을 그려가면서 대화를 하기도 한다.

1997년 동남아시아 여행중 지붕 숙소의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1997년 동남아시아 여행중 지붕 숙소의 한비야 (출처=연합뉴스)

-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 네덜란드 출신 국제구호 전문가다. 아프가니스탄 구호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구호조직의 높은 상사였다. 현장에서 매우 엄격했는데, 같이 여행하면서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환갑의 나이에 결혼했는데. 지금 행복하다. 남편과 나는 신앙, 가치관, 지향점이 같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336 법칙에 따라 생활한다. 한국에서 3개월, 네덜란드에서 3개월씩 함께 지내고 나머지 6개월은 각각의 삶을 산다.

-- 좌우명이나 삶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 즐겁고, 자유롭게, 기왕이면 남 도와주면서 사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 본인 삶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나.

▲ 나에게 성공은 내가 가진 힘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아낌없이 쏟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공했다고 본다. 나는 해마다 해외 현장에 나가서 구호 활동을 했다. 작가로서도 성취를 이뤘다. 내 생각이 독자들에게 잘 전달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쓴 책 10권의 판매 부수는 통틀어 400만 부 가량이다.

한비야와 그의 남편 안토니우스 반 주트펀 (출처=연합뉴스)
한비야와 그의 남편 안토니우스 반 주트펀 (출처=연합뉴스)

-- 은퇴는 언제 하나.

▲ 작년에 월드비전 시민학교 교장직에서 내려왔고, 올해 초 현장 구호 활동도 마무리했다. 만 66세가 되는 2025년에 이화여대 교수직도 그만둘 예정이다. 자발적 은퇴를 하는 셈이다. 작가로서의 삶은 지속할 것이다.

-- 앞으로의 계획은.

▲ 내 돈으로 내가 직접 도와주는 '내돈 직도' 프로젝트에 나설 예정이다. 남편과 결혼해서 쿠바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시골 성당의 성가대에 타악기 외에는 악기가 없었다. 우리는 그 성당에 풍금값을 건넸다. 여행 후에 그 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는데 우리는 동의했다. 우리는 앞으로 5년간 매년 겨울마다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이런 기부를 하기로 했다. 그동안은 월드비전 같은 큰 조직을 통해 도와줬지만, 이제는 나의 적은 돈으로 현장에서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멕시코로 시작해서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등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을 할 수 있을까.

▲ 가난하지만 똘똘한 아이들에게 학비를 대줄 수도 있다. 어느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간다면 병원비를 지원해줄 수도 있다.
눈이나 비 걱정 없이 미사를 볼 수 있도록 지붕을 만들어줄 수도 있다.

(취재지원 정한솔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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