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북한

떡국 대신 ‘이북식 만둣국’…차별·외로움 견디는 탈북민 명절나기

뉴스1

입력 2025.01.28 08:02

수정 2025.01.28 08:02

27일 '2025년 설맞이 탈북민 초청 잔치'에서 북한 전통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
27일 '2025년 설맞이 탈북민 초청 잔치'에서 북한 전통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


27일 '2025년 설맞이 탈북민 초청 잔치'에서 탈북민들이 모여 북한 음식을 함께 만들고 나눠먹는 모습
27일 '2025년 설맞이 탈북민 초청 잔치'에서 탈북민들이 모여 북한 음식을 함께 만들고 나눠먹는 모습


이북식 만둣국을 함께 만들어 먹으니 머릿속에만 그리던 고향을 찾아온 기분입니다.

(서울=뉴스1) 임여익 기자 = 27일 월요일 오전 11시 경기도 안양시 모 교회 강당. 북한 평안남도 순천에 살며 정치범 관리소에서 간부로 일하다 2011년 일가족과 함께 탈북한 전 모 씨(65)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으로 따지면 경찰에 가까운 업무를 북한에서 일평생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순간 본인과 가족이 억압과 감시의 대상이 되자 그제야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되어 탈북을 결심했다고. 그는 가족과 안양에 정착해 현재 7년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날 강당에서는 150여명의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이 참석한 가운데 '2025년 설맞이 탈북민 초청 잔치'가 열렸다.

아침에 눈이 내렸다가 잠시 그쳐 길이 질척대고 흐린 날씨였음에도 이곳은 설을 맞아 고향을 그리기 위한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부분 60대 이상의 고령층인 이들은 털모자와 두꺼운 패딩으로 중무장한 채 좁은 강당에 다닥다닥 붙어앉아 옆자리 사람에게 다소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명절을 함께 보낼 가족이 없는 사람, 어릴 적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 생각나는 사람,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내던 고향 말투가 그리운 사람들이 한데 모인 것이다.

"아 내 고향. 민들레 곱게 핀 언덕에 앉아 기름진 달래벌 바라볼 때면 출렁출렁 흘러드는 석개울 물소리 이 가슴 적셔주네"

참석자들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이북 말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탈북민 최금실 씨(49)의 무대가 시작됐다.

황해남도 재령군에서 태어난 최금실 씨는 북한 5대 특수기관 중 하나인 사회안전 협주단에 소속돼 군복을 입고 당의 선전선동을 위한 공연을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90년대 북한 최악의 식량난인 '고난의 행군'을 겪고 가족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경험을 하면서 탈북을 결심했다.

4남매의 장녀였던 그는 영양실조로 다리가 마비돼 홀로 북한에 남겠다고 한 아버지만을 고향에 둔 채 지난 2008년 가족을 이끌고 탈북을 감행했다. 현재는 한국에서 4집 앨범까지 발매한 가수로 활동 중이다.

최 씨는 "명절 때마다 고향에 혼자 계시는 아버지 생각이 난다"며 "저처럼 보지 못하는 가족이 있는 이들을 위해 오늘 노래를 부르러 왔다"고 했다. 그녀의 마지막 곡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강당에서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바로 옆에 위치한 식당은 북한 음식을 만드는 손길로 분주했다. 교회 관계자들과 탈북민들이 두부밥, 농마국수, 만둣국 등 북한 전통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과 설 풍경은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우선, 한국은 떡국을 먹는 반면 북한에서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만둣국을 먹는다. 이는 북한에서는 남한만큼 벼농사가 발달되지 않아 떡이 귀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음력설을 더 중요시하는 한국과 달리 북한은 양력설을 더 크게 쇤다. 북한도 설에 차례와 세배를 드리는데, 가족과 친척 뿐 아니라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찾아 새해 인사를 드리는 문화가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차이가 있다.

특히, 이러한 기조는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이 흩어진 민심을 다잡기 위해 명절을 내부결속의 계기로 활용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탈북민 임 모 씨(58)는 "한국에 온 뒤로 설날에 떡국만 먹다가 오늘 오랜만에 만둣국을 먹으니 가슴에 묻어두고 온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면서도 "고향 사람들과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오늘은 외롭지 않은 명절로 기억될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인 탈북민 총 3만 1300여명 가운데 1만 명 이상이 경기도에 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안양을 비롯해 광명·과천·시흥·부천 등 경기 서부는 탈북민이 가장 밀집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측 관계자는 "평소에도 지역 봉사활동을 다니며 종종 탈북민 분들을 만나는데 열악한 생활환경이나 아직 사회에 남아있는 차별 등 탈북민들이 겪는 여러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외로움'이라고 느꼈다"면서 "명절 만이라도 탈북민 분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드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지역 주민 김경식(65) 씨는 "우리 아파트에도 탈북민 분들이 몇 분 계시는데 이분들은 가족이 멀리 떨어져 있어 명절에도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저라도 함께 온기를 나누고 싶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